이번 주에는 논어 대신 사자소학을 읽었습니다. 읽은 걸 10번씩 써보는 시간도 가졌어요. 다들 오랜만에 써보는 한자였죠.
사자소학은 서당에서 천자문을 떼고나서 배우던 교과과정이었죠. 인간으로, 사회구성원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도리와 규범을 네 글자로 한 구절씩 묶어서 아이들이 익히기 쉽게 만든 책입니다. 주자의 소학과 여러 경전을 출전으로 삼아 엮은 책이죠.
주막집 노파의 가르침
부생아신(父生我身)하시고 모국아신(母鞠我身)이로다. 아버지 내 몸을 낳으시고 어머니 내 몸을 기르셨다. 이렇게 시작되죠. 첫 구절을 읽는데, 다산 정약용 선생이 남긴 글을 모아놓은 책 속 구절이 떠오르는 거예요. 선생께서 강진으로 유배가서 어느 주막집 구석방에 얹혀 살때 얘기였죠.
주막집 노파가 선생께 물어요. 부모의 은혜는 한가지지만, 어머니 수고로움이 더 큽니다. 그런데 성인의 가르침에는 아버지를 더 무겁게 여겨 성씨도 아버지를 따르고 외가보다 친가를 더 위하고 상복도 어머니를 낮추니 너무 치우친 거 아닌지요?
선생이 대답합니다. 아버지께서 날 낳아주신 까닭에 어머니 은혜가 비록 깊지만 천지에 처음 나게 해 주신 은혜가 더 중한 걸세.
대답이 흡족하지 않은 노파가 자기 생각을 말하죠. 나리 말씀이 꼭 맞지는 않습니다. 제 생각에, 초목에 견준다면 아버지는 씨앗이고 어머니는 땅인 셈이죠. 씨를 떨어뜨리는 것보다 땅에 양분을 주어 기르는 일이 더 힘듭니다. 그런데 조를 심으면 조가 되고 벼를 심으면 벼가 됩니다. 몸을 온전하게 만드는 건 땅의 기운이지만, 종류는 모두 그 씨앗을 따라 가죠. 성인의 가르침은 이를 본받았을 겁니다.
이 말을 들은 선생은 천지 사이에 지극히 정밀하고 미묘한 뜻을 펼치는 노파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어 자리에서 일어나 깨달음을 준 노파에게 예를 표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사자소학 첫 두 구절을 정확히 풀이해주는 일화가 아닐 수 없어요. 성인의 가르침을 곰곰 새기며 삶의 지표로 삼는 노파나, 배움과 깨달음 앞에서 지체나 격식을 따지지 않고 존경을 표하는 다산 선생의 태도를 보면서 선조들의 기품을 느낄 수 있죠.
음식정의(Food Justice)가 필요한 시대
인문학당 도반들은 모두 호가 있습니다. 이름 부르는 게 자연스럽지 않은 우리 습관 탓도 있고, 그 사람의 개성을 드러내거나 성품을 보완해준다는 뜻에서 호를 지어 일년에 한번씩 시호식을 했죠. 올해는 백영희님이 청연이라는 호를 받았어요. 맑을 청에 벼루 연인데, 붓글씨와 난을 치고 수석(水石)을 좋아하는 백영희님에게 꼭 어울리는 호라는 생각이 드네요.
두째 시간에는 청연님이 오븐에 따끈따끈 구워온 군고구마를 먹으면서 한국의 SBS방송 스페셜 생명의 신비라는 프로그램을 봤어요. 음식이 인간 삶에 미치는 영향, 특히 직접 기른 채소를 먹으면서 일어나는 삶의 변화를 보여주었죠.
내가 먹는 음식이 나를 결정한다(You are what you eat)는 말이 일상화될만큼 먹을거리에 대한 관심이 강렬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신선하고 영양있는 채소를 먹을 수 있는 건 아니죠. 소득의 불균형만큼이나 음식섭취의 불균형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어요. 어떤 음식을 먹느냐의 문제는 그대로 인간의 존엄과 권리의 문제로 이어지죠.
그래서 뜻있는 사람들이 가정과 지역에서 벌이는 유기농 텃밭가꾸기, 채소나눠먹기 운동은 사람의 몸과 마음을 살리는 인권운동이자 음식정의를 실천하는 사회운동이기도 하죠. 인문학당에서도 구체적으로 이 일을 실천에 옮기려고 합니다. 창립 3주년 기념사에서 강인호 대표가 밝힌 프로그램 다양화에는 자연농법으로 채소를 가꾸어 자급자족하고 나누는 공동체를 만들려는 계획도 들어 있습니다. 뜻과 관심있는 분들의 참여와 조언 부탁드려요.
우수에 젖은 구도자
한 이십 분 남은 시간에는 서양철학사에서 키에르케고르를 잠깐 공부했죠. 코펜하겐의 우울하고 고뇌에 찬 철학자, 헤겔의 무모한 자만심이 만들어낸 객관주의, 전체주의, 국가주의 철학체계에 온 몸으로 저항하면서 결단의 주체로서 개인을 강조하고, 신 앞에 홀로 서는 단독자의 문제로 신앙을 설파하여 현대철학과 신학에 깊은 영향을 미친 실존주의자.
인간실존의 한계상황과 죄의식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평생을 강박 속에 보낸 처절한 모습이 안타깝기도 하지만, 궁극적인 진리를 향해 끊임없이 추구하려는 구도의 자세는 치열하기 그지없죠.
매순간 자신을 닦고 사물의 근본을 익히며 도를 실천하려 했던 동양의 인간상과도 통하는 바가 있어요. 다만 동양인의 감수성에는 기독교적인 죄의식을 찾아볼 수 없고, 삶의 조건을 바라보는 시각도 훨씬 대범하고 긍정적이라는 차이가 있죠.
어느새 10시를 훌쩍 넘겨버렸어요. 두 시간을 셋으로 쪼개 수업하니까 덜 지루하고 색다른 맛이 느껴지네요. 호흡이 긴 주제를 다루지 않을 때는 이렇게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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