솟구쳐 오르는 생명의 힘으로

by 황기용 on December 27, 2009 · 0 comments

in 살아가는 이야기

2009년의 끝자락에 서서 지나간 날들을 돌이켜 봅니다. 스물 네 조각으로 쪼개진 하루라는 의식의 시공간 안에 갇혀 살다가, 365일을 거슬러 가보고, 10년을 건너뛰어 돌아가 보기도 합니다. 그렇게 기억과 시공간을 넓혀가다보니 천년, 이천년을 훌쩍 넘는 긴 세월과 지구 밖 온 우주가 내 작은 몸 속으로 가득 차게 들어오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가만 보니, 그 장구하고 광활한 시간과 공간은 이미 내 생각과 몸 속에 다 들어있는 거드라구요. 그것과 새삼 맞닥뜨렸다,는 말이 더 맞을 것 같아요. 혹독한 환경에서 생존과 더 나은 삶을 위해 몸부림쳤던 먼 인류의 거친 숨결이 내 속에서 고스란히 감지되고, 21세기를 사는 우리도 똑같이 그 일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 앞에서, 인류가 이루어놓은 불완전한 문명에 대고 아무리 주먹질을 하고 싶어도, 잠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군요.

우리를 둘러싼 공기의 무게가 답답하고 버겁게 느껴집니다. 꼭 10년 전, 21세기를 코 앞에 두고 느꼈던 공기의 무게와 비교하면 얼마나 다른지요. 테러와 전쟁과 방종으로 21세기 첫 10년을 망쳐버린 우리, 지난 날 막 살아온 값을 치르며 살아야 할 앞날이 두렵고 걱정됩니다. 수천 년 이어온 것처럼 그렇게 또 헤쳐나갈 거다, 그렇겠죠?

하지만, 그 믿음이 부실하고 공허하게 느껴집니다. 지금까지 해온 대로가 아니라, 우리 안에 아직 싹트지 않은, 인류의 유전자 속에 아직 각인되지 않은 전혀 새롭고 근원적인 어떤 길이 절실한데, 그 길을 인류라는 종에게서 기대할 수 있을까, 해서 말이죠. 

침울하고 어두운 얘기로 서두를 꺼낸 걸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비관의 말을 쏟아내고 낙담할 때가 있다 해도, 생명의 힘은 역시 다시 솟구쳐 오르고 뚫고 나가는 데 있죠. 그건 확실히 믿습니다.

12월 26일 저녁 인문학당 송년모임 보고 드릴께요.

연말에 멀리 가족을 방문하거나, 일 때문에 바쁜 분들 외엔 다 오셨어요. 이번 송년모임은 돌잔치나 회갑연처럼 화목하고 정겨운 가족모임 같기도 하고, 변시철님 말씀처럼 만년동창회같은 흥겨움과 친근함이 넘치는 분위기였죠. 인생의 만년에 만나 함께 배우는 학우로서 죽을 때까지 배움의 길을 가는 동지가 되자는 다짐도 했습니다.

시와 노래를 사랑하는 풍류객 이상도님은 이 겨울에 잘 어울리는 백석 시인의 ‘나와 나타샤와 하얀 당나귀’를 구성지게 읊어 향수를 자극했습니다. 눈이 거의 내리지 않는 아틀란타에서 ‘하얀 눈이 푹푹’  내린다는 시어를 듣고 있자니, 시인의 고향 함경도 어느 산골 초가집 군불 땐 아랫목에 앉아 눈 내리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 같았죠.

백석 시인이 그토록 사랑해 눈 쌓이는 긴긴 겨울밤을 애타게 기다리던 나타샤는 서울 장안에서 대원각이라는 유명짜한 요리집을 운영한 김영한이라는 여인이었다는 뒷이야기까지 나오자, 백정식님 왈, 그 대원각 여주인의 양아들이 내 친구였거든, 하면서 침을 튀기며 흥분했어요. 불심이 지극한 그 여인, 엄청난 재산을 모두 부처님 앞에 바쳤다죠.

이때부터 칠순을 훨 넘긴 우리의 왕오라버니들께서는 대동아 전쟁때 내가 말이야, 하면서 타임머신을 타고 나이를 거꾸로 드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오륙십대 젊은 사람들 노는 걸 뒷전에서 지켜보기만 하시던 왕오라버니, 왕언니들 이번에는 화끈하게 실력발휘 하셨답니다.  세상에나, 강호에 숨어있는 고수들이 이리 많았다니…

먼저 이웅민, 이세숙 부부의 노래실력에 모두들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집하고 병원밖에 모르는 전형적인 범생이 타입의 두 분께서 그런 예능을 숨기고 있었던 거죠.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뱃사공을 애절하게 뽑으시는 이웅민님의 목소리와 창법은 우리 모두를 두만강 물결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젖어들게 했구요. 바위고개를 부르는 이세숙님은 그저 한 마리 고운 꾀꼬리가 목을 뽑고 노래하는 듯 했죠.

‘이 생명 다 바쳐 당신만을 사랑하리..당신없는 사랑이란 있을 수 없잖아요.’ 부인이 부르는 가사에 변시철님은 “이 노래만 하면 난 꼼짝 못해, 그래서 꼭 저 노래만 불러댄다니깐.” 부인을 향해 미소를 날리는 백발에 불콰한 얼굴이 꼭 홍조 띈 수줍은 소년 같았죠. 

아틀란타 노래자랑 일등상에 빛나는 백정식님 부인은 우리들 입에서 언니~를 연호하게 만들고, 우리들의 영원한 오빠 백정식님은 노래가락에 맞춰 나홀로 부르스를 추면서 예쁨을 받으셨답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돌아가며 노래를 부른 덕에 모든 도반들의 노래솜씨가 백일하에 드러났어요. 생김새나 성격만큼이나 제각각인 음색과 발성으로 한바탕 놀이판이 벌어졌더랬죠.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는 2009년 연말을 보내지만, 그래도 함께 할 벗들이 있어 흡족하고 마음 푸근했습니다. 모두 새로운 각오로 힘차게 새해 맞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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