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만들어 놓은 평화원 숲길이 겨울이 되니 더욱 운치 있어 보이고 정겹다. 백거와 땀 흘리며 길을 개척할 즈음만 해도 이게 언제 길다운 길이 될 건가 싶었는데, 이젠 제법 자리가 잡힌 으젓한 숲길이 됐다. 빛바랜 낙엽들이 오래전에 벗어놓은 속옷처럼 수북수북 쌓인 숲, 나목들은 곳곳에서 수만 수억 실가지 촉수를 흔들며 하늘을 핥고 있다. 하늘과 교접하는 겨울나무들. 그 사이로 열리고 있는 숲길을 천천히 걸으며 새해를 생각해 봤다. 길을 나서기 전 뽑아봤던 괘사와 효사를 떠올리며.
괘는 乾괘에 초구 변효가 나왔다. ‘초구는 잠용이니 물용(潛龍勿用)이라’는 문왕의 효사보다 공자가 썼다는 문언의 효사를 읽던 중 눈에 띄었던 말이 내내 머릿 속을 맴돈다. 樂則行之 憂則違之…기분이 좋으면 하고, 기분이 언짢으면 하던 일 그만두고 떠난다는 구절이다…뭔가 공명을 일으키는 새해 화두다.
사실 난 내내 그래왔고 남도 그렇게 하길 바랬고 왔으로도 내내 그렇게 하며 살아갈 터이다. 그런데 금년엔 아예 이런 태도 자체가 내 화두가 되다니,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가!. 그런 생각을 하니 새해를 생각하며 걷는 숲길이 편안하다. 무슨 일이든 억지로 할 일이 아니라는 것, 정말 위안이 되는 말이고, 내 인생과 삶을 푸근하게 정당화 시켜주는 말이 아닌가.
初九曰 潛龍勿用은 何謂也오 子曰 龍德而隱者也니 不易乎世하며 不成乎名하야 遯世无悶하며 不見是而无悶하야 樂則行之하고 憂則違之하야 確乎其不可拔이 潛龍也라
초구에 이르기를 잠용이니 쓰지 말라는 말은 어떤 뜻인가. 선생께서 이르기를 초구 양효의 본 뜻은 은자라는 것이니, 세상이 바뀐다고 함께 변함이 없고, 이름 내려고 해쓰지 않고, 세상으로부터 소외돼 있으나 고민하지 않고, 자기가 옳다고 인정하는 자 없어도 고민하지 않으며, 즐거우면 하고, 마음 내키지 않으면 그만두고 떠나니, 그 확실한 마음을 누구도 빼앗지 못하는 것, 이것이 곧 잠겨있는 용, 잠용이니라
속이 그윽하게 익은 선비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소신 껏 사는 모습을 연상케하는 얘기이기에 한껏 멋지다. 하지만 이 말이 무수한 무능한 선비들을 옹고집 불통으로 만들수도 있었으리라는 생각을 하니 한편으로 슬긋 소름이 돋는다. 소신대로 살돼 결코 옹고집이어선 안될게다. 자칫 기분 내키는 대로 살자는 좌우명이 되어서도 안될 거고…그렇다면, 이 말은 조금 더 깊이 새겨야 겠지?
‘기쁘면 행하고 기분 내키지 않으면 그만 두고 떠난다’고 새기기 보다는, ‘아무리 힘들어도 언제나 기쁨으로 행하되, 정말 이래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느냐 판단 되는 상황이라면 아무리 오랫동안 공들여 온 것이라 할 찌라도 가차없고 미련없이 그만두고 떠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어떨까? 그래, 그래야 할 거다.
금년에 내가 할 일들, 아니, 하고 싶은 일들을 하나하나 생각해 본다.
먼저, 나는 부담없이 제대로 된 농토에서 그동안 연구해 온 자연농업을 제대로 실천해 보고 싶다. 근데 도대체 부담없이 제대로 된 농토를 얻기가 너무 힘들다. 그 부담이 결국 문제가 될 것 같기에 추진하려던 땅임대 건은 과감하게 취소하겠다. 농사는 작년 수준에서 짓되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가고, 무리하지 않는 범위에서 평화원 땅을 개척해 보련다.
주말 자연학교를 열겠다. 자연농사 체육 예술 문학 역사 철학 등 여섯 과목을 가르치겠다. 커리큘럼을 확정짓고 자원교사도 모집, 준비를 철저히 하겠다. 문제는 어떻게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 청년부를 나누어 교사를 준비하느냐 하는 점이다.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모이는 사람들에 따라 대처해 보자.
조금이라도 농사지은 채소를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는 일들을 펼쳐보고 싶다. ‘People’s Grocery’ 프로젝트를 해보고 싶은거다. 이상적인 것은 내가 사는 흑인 동네 사람들에게 싼값에 채소를 공급하는 것이다. 잘 될지 모르겠지만 해보자.
인문학당과 자연학교, 농사짓는 일, 나누는 일 등이 모두 별도의 프로그램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함께 어우러지도록 운영하고 싶다.
이렇게 대외적으로 하고 싶은 일들도 있지만 내가 홀로 해야 할 일들도 있다. 그동안 미뤄왔던 일들 가운데 정말 금년엔 꼭 이루고 싶은 것. <한인사회의 공동체 형성을 위한 철학과 전략>이라는 제목의 책. 한인사회의 현실은 한인사회 자체가 공동체적으로 구성되지 못한 상태에서 떠돌이 유민 상태라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철저히 소외되어 있고 게토화 되어있다. 어떻게 미국사회에서 정착하되 자기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를 공동체 구성의 과제로 삼고 풀어 나가고자 한다. 유대인의 공동체 형성 역사에서도 배울 게 있지만 우리는 우리들 방식으로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 그 역사적 실례들을 알아보면서 우리들에게 적합한 가능성을 타진해 본다.
책 내용은 우리의 상황에 대한 인식이 우선 나와야 겠고, 대안으로서으로서의 유대인 공동체 운동의 사례연구, 갖가지 공동체 운동이 지닌 의미와 문제점, 실질적인 대안으로서의 공동체운동 철학과 전략 등이다. 교회의 역할에 대해서도 언급해야 할 것이다. 교회가 한인사회의 공동체형성에 어떤 역할이 과연 가능한가는 사실 회의적이지만 최소한 방해라도 하지 말아야 할 부분, 협력할 부분들, 혹은 열린 교회라면 어떻게 적극 참여할 수 있을지에 대한 얘기가 나와야 할 거다. 한인회라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구성돼야 하는지, 지금의 구조가 지닌 태생적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등도 얘기돼야 할 거다.
또 다른 기획. 아틀란타에 오기 전에 뉴저지에서 가졌던 <미학과 주역> 강의를 책으로 엮는 문제가 아직도 결실을 얻지 못했다. 이것도 씨만 뿌렸지 거두지 못했던 과제였다. 마무리해서 책을 만들어 보련다. 미학이라는 것이 단순히 철학의 한 분야로서가 아니라 서구철학과 문명이 여기서 총화를 이루고 있는 그런 의미의 화두라고 한다면 주역은 동북아 철학과 문명이 오랜 세월간 여기서부터 형성되고 총화를 이뤄왔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논지로부터 출발해 강의를 시작했었다. 심지어 강의에서 예수와 공자와의 가상 대화도 시도해 봤다. 동양인의 의식 안에 구조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주역의 원형적 비유를 체계화 해 보자.
그 밖에도 시시콜콜 해야할 일 미뤄왔던 일 별별일 많겠지만 일단 위의 두 가지 과제는 금년에 꼭 실천해야 할 것들이다. 조금씩 꾸준히 해 보자.
새해 화두, 다시 새겨보자. 樂則行之 憂則違之 모든 일을 기쁜 마음으로 행하되 옳지 않다 생각되면 즉시 그만 둔다. ㅎㅎ 아무리 생각해도 새해 화두 맘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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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진 01.06.10 at 8:57 pm
항상 소신을 지키며 사시는 목사님이 모습이 존경스럽습니다. 저는 올해의 화두를 회광반조(廻光返照)라 정했습니다. 내 밖을 비추던 불빛을 내 안으로 돌려 나 자신을 살핀다는 의미라지요. 그동안 부질없이 남을 바꾸려 애썼던 짓거리를 이제 그만 줄이고 스스로를 바꾸려는 노력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겠다는 생각입니다. 목사님의 화두도 항상 마음에 새기며 살아갈 만한 말씀이라 여겨집니다. 올해 계획하시는 여러 일들이 거대한 우주의 섭리에 합일되는 귀한 열매로 결실이 맺어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