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부터 칼 마르크스의 철학에 대한 강의가 시작됐다. 현대를 사는 지성인이라면 마르크스에 대해 기본적인 상식이라도 갖추는 게 역사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지금 소개하려는 글 속에서 마르크스는 인간의 해방을 위해 유대인으로부터의 해방을 외치고 있다. 도대체 마르크스가 이해하고 있는 유대인은 어떤 것일까? 아마도 미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민자로서 유대인에 대한 마르크스의 이해는 지금까지 지니고 있던 우리들의 상식을 여지없이 부술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작 유대인에 대한 이해가 아니다. 유대인 문제를 다루면서 쏟아 놓고 있는 마르크스의 인간이해, 세계 이해, 특히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기초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사회과학적 이해 같은 것들이 너무나 소중하다. 인문학당 부교재로서 충분하리라 믿는다.<2010-1-21역자주>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
1843년, 칼 마르크스
이 글은 1843년 가을에 작성, <독.불연감(Deutsch-Franzoesische Jahrbuecher)>에 실렸던 것이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또 다른 젊은 헤겔 학도였던 브루노 바우어의 유대인 문제에 관한 두 편의 논문을 읽고 나름대로 비판적인 목적을 추구하고 있다. 1부에서 마르크스는 정치 비평을 전개하면서, 인간 해방은 ‘시민사회(civil society)’의 이기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국가의 추상적 시민으로서의 인간을 구분해 왔던 기존 인식의 종식을 요구하고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고 있다. 2부에서 마르크스는 그가 ‘유대교’와 동일시 하고 있는 경제 혹은 상업에 대해 비판적 분석을 펼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유대교로부터의 사회의 해방’을 외치고 있는데, 바로 이 것이 마르크스의 반셈주의 성명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지만, 이것은 실제로 사회를, 이 글에서 이야기 하고 있듯이 ‘돈만 아는 비열한 도붓 장사들’로부터, 혹은 결국 그가 나중에 강조하게 되었던 것처럼, ‘자본주의’로부터 해방 시켜야 한다는 의미에서 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가 비록 유대인 출신이지만 반유대인적 태도를 비호하고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한 태도를 나타내는 표현이 이 글에서 발견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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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루노 바우어의 유대인 문제(Die Judenfrage)[1]
독일 유대인들은 해방을 추구하고 있다. 그들은 도대체 어떤 종류의 해방을 원하는 것일까? 그들은 시민적, 정치적 해방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부르노 바우어가 그들에게 대답했다: 독일에서는 누구도 정치적으로 해방된 사람이 없다. 우리들 자신이 아직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너희들 유대인들을 해방시킬 수 있단 말인가? 만약 너희들이 스스로를 위해 유대인으로서의 특별한 해방을 원한다면 너희들 유대인들은 이기주의자들이 아닐 수 없다. 너희들은 독일인으로서 독일의 정치적 해방을 위해, 인간으로서 인간의 해방을 위해 일해야 한다. 너희는 너희가 겪고 있는 특별한 종류의 억압과 수치에 대해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법칙에 대한 예외로서가 아니라 법칙에 대한 확인의 차원에서다.
아니면 유대인들은 기독교 국가의 인민들과 동등한 입장에 놓이기를 원하는 것인가? 만약 그들이 기독교 국가가 합법적으로 성립된 것임을 안다면 정부가 요구하고 있는 일반적 예속에 대해서도 알 것이다. 그들은 왜 일반적인 멍에는 받아들이면서 그들에게 주어진 고유한 멍에에 대해서는 견디기 힘든 부담을 느껴야 하는가? 유대인들은 독일의 해방에 대해 관심이 없는데 왜 독일인이 유대인들의 해방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기독교 국가는 특권만을 인정한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유대인 됨의 특권을 누려왔다. 유대인으로서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갖지 못한 권리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자기들은 갖지 못한 권리를 가졌다고 해서 그토록 난리들인가?
그들은 기독교 국가로부터의 해방을 요구하면서 기독교 국가에게 그들에 대한 종교적 편견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그들의 유대교적 편견을 포기했는가? 그러고도 타 종교인들에게 그들의 종교를 부인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인가?
기독교 국가는 성격상 유대인들을 해방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러나, 바우어는 한걸음 더 나아간다, 유대인들 또한 바로 그들의 성격 때문에 해방될 수 없다. 국가가 기독교 국가로 남아 있어야 하는 한, 그리고 유대인들도 유대교도들로 남아있어야 하는 한, 그들은 모두 똑 같이 서로 간에 누구를 해방시킨다는 것, 서로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유대인들을 존중하는 입장에서, 기독교 국가는 기독교 국가로서의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다. 즉 기독교 국가는 유대인들에게 기독교 국가의 국민들과 분리되어 살아가도록 하는 특권을 허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럴 경우 기독교 국가는 다른 모든 사회 영역으로부터 유대인들에게 쏟아지는 온갖 압력을 허용해야 한다. 더구나 이러한 압력이 한층더 강화될 수 밖에 없는 근본 원인은 유대인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주류 종교에 대한 종교적 적대감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인들 또한 마찬가지로 유대교도로서의 태도, 즉 국가에 대한 이방인으로서의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실제의 국적에 대하여 그들의 가상 국적으로, 실정 법에 대하여 그들 자신의 가상 법으로 대항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을 자신들과 다른 나머지의 인류로부터 철저히 분리하는 것을 자기들의 권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원칙적으로 어떤 역사 운동에도 동참하지 않는다. 그들은 인류 전체의 미래와는 전혀 공통되는 바가 없는, 그들 만의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자신을 유대교 백성의 하나,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유대교 백성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너희 유대인들은 도대체 어떤 근거에서 해방을 요구하는 것이냐? 너희의 종교적인 입장에서냐? 하지만 너희 종교는 국가 종교에 대해 숙명의 적이다. 시민으로서냐? 그러나 독일에는 시민이 없다. 인간으로서냐? 하지만 너희는 더이상 너희가 호소할 수 있는 인간 이상의 인간이 아니다.
바우어는 초기 접근과 해결책에 대한 비평을 마치고 유대인 해방의 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공식화한다. 그는 묻는다. 도대체 해방되어야 할 유대인의 본질적 성격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를 해방시켜야 할 기독교 국가의 성격이란 무엇인가? 그는 유대교를 비판함으로써 대답한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종교적인 대립을 분석하고 기독교 국가의 본질을 설명한다. 돌격적이면서도 명료하게, 재치와 깊이를 가지고, 간결하고 격렬한 만큼 또한 엄밀하게 논지를 전개해 나간다.
그러면 바우어는 유대인이 제기한 문제를 어떻게 풀고 있는가? 결과는 무엇인가? 문제를 공식화 하는 것은 이것을 해결하기 위함이다. 그의 유대인 문제에 대한 비평적 연구는 유대인 문제에 대한 대답이다. 요약하면 이렇다. 우리는 남을 해방할 수 있기 전에 우리들 자신이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
유대인과 기독교도들 간에 놓인 가장 완고한 형태의 대립은 종교적 대립이다. 그 대립은 어떻게 해결 되는가? 대결을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해결된다. 어떻게 종교적 대립을 불가능하게 할 수 있는가? 종교를 폐지함으로써 가능케 한다.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존경하는 종교라는 것이 인류발전의 한 단계에 불과하다는 것, 역사에 의해 벗겨진 뱀껍질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리고 인간은 그 껍질을 뒤집어 쓴 뱀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들은 곧바로 종교적 대립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오직 순수하게 비판적이고 과학적인, 그리고 인간적인 관계만 남게 될 것이다. 과학이 그들을 하나로 묶어 줄 것이다. 물론 과학적 대립은 과학 자체로 해결될 일이다.
독일 유대인들은 특히 정치적 자유의 결핍과 기독교의 국교 공인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러나 바우어에게는 유대인 문제가, 특별히 독일적으로 조건 지워진 것과는 별개의 것으로서, 일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종교와 국가 간의 관계 문제, 종교적 편견과 정치적 해방 간의 모순의 문제 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종교로부터의 해방이 정치적 해방을 원하는 유대인들과, 그들을 해방 시켜야 하고 스스로도 행방되어야 하는 국가, 모두에게 하나의 조건으로 자리 잡고 있다.
“좋다. 그렇게 얘기될 수 있다(유대인 스스로도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그렇지만 유대인은 해방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유대인이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항상 시민에게 이등의 자리를 만들어 줘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현재 유대인이면서 앞으로도 유대인으로 계속 남아 있기를 원함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시민이기를 원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탁월하고 보편적인 도덕적 신념 때문에 그들은 해방되어선 안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현재 유대인이고, 앞으로도 계속 유대인으로 머물 것이다. 비록 그들이 현재 시민이고 시민으로서 보편적 인간 조건 속에 살고 있다 할찌라도 그렇다. 그들의 제한된 유대교적 천성은 그들의 인간적 조건과 정치적 의무을 넘어서서 항상 최종적으로 승리할 것이다. 그들의 타고난 성향은 끝까지 남을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일반 원칙에 의해 극복된다고 해도 그렇다. 그러나 그것이 끝까지 남아 자기를 주장하는 한 그것이 다른 모든 것을 극복하고 승리했다는 것이 더욱 사실이 될 것이다..”
“유대인이 정치 생활에서 유대인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궤변적이고 피상적인 의미에서만 가능하다. 유대인이 유대인으로 남기를 원한다면, 이것은 결과적으로 피상적인 것이 본질적인 것이 되고 그래서 유대인은 승리를 하고 만다는 것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국가 안에서의 유대인의 삶은 한갖 가장에 불과하거나, 혹은 본질적이고 정상적인 것에 대한 순간적인 예외가 되고 말 것이다.”[2]
바우어가 국가의 역할을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자.
“프랑스는 최근[3] 우리에게 유대인 문제와 그 문제 때문에서 야기되는 모든 다른 정치적인 문제들과 연관해서 하나의 가관이라고 할 만한 삶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것은 자유롭기는 하지만 그러한 자유로운 삶 자체가 법적으로 그 자유 자체를 폐기시키는, 그러면서 그것은 다만 외양 뿐이라고 선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행동으로 자유로운 법을 거부하는 그런 삶이다.”[4]
“프랑스에서는 아직 보편적인 자유가 법적으로 확립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법적 자유, 즉 모든 시민의 시민적 성격은 실제 생활에만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 생활은 아직 종교적 특권에 의해 주도되고 파편화 되어 있으며, 그리고 실제 생활에서의 자유의 결핍이 반대로 법에 영향을 미쳐서 법이 오히려 태생적으로 자유로운 시민들을 억압자와 피억압자로 나누는 것을 허용하는 지경이다.”[5]
그러면 프랑스에서는 언제 유대인 문제가 해결될 것인가?
“유대인들이 실제로 유대인이기를 멈출 때, 예를 들자면, 만약 유대인이 자기들의 종교적인 법으로 하여금 국가와 동료 시민을 위한 의무 이행의 금지를 허용치 않을 때; 즉 그들이 안식일에 공공 업무를 위한 대표회의에 참석할 수 있게 될 때다. 한걸음 더 나아가, 모든 종교적인 특권과 그 특권을 누리고 있는 교회의 독점을 폐지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요구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 만약 소수나 혹은 다수의, 심지어는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자기들의 종교적 의무를 이행해야 겠다고 느낀다면, 이럴 경우는 그들에게 종교적 의무 이행이 절대적으로 사적인 일로서 치부되어야 할 것이다.”[6]
“특권적인 종교가 없어지면 더이상 어떤 종교도 없게 될 것이다. 종교로부터 파문할 수 있는 권한을 빼앗아 보라. 종교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7]
“마틴 두 노르드씨는 법에서 일요일에 대한 어떤 언급도 삭제할 것을 요구하면서 기독교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자는 제안의 의미를 읽었다. 평등권과 함께(이 권리는 확실하게 확립된 것인데), 안식일 법은 더이상 유대인을 구속하지 않는다는 선언은 유대교의 종말을 선포하는 의미가 될 것이다.”[8]
이렇게 바우어는 한편으로 유대인들이 유대교를 거부해야 할 것을 요구하면서, 모든 인간은 시민으로서 해방되기 위해 일반적으로 종교를 거부해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주장이 논리적으로 종교에 대한 정치적 폐기는 모든 종교의 폐기를 의미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 종교를 전제로 한 국가는 아직 참된 혹은 실제적인 국가가 아니다.
“종교적 이념은 분명 국가에 어떤 확신을 준다. 그러나 어떤 국가에 그런 확신을 주는가? 어떤 종류의 국가에?”[9]
이 지점에서 우리는 유대인 문제라는 것이 다만 하나의 국면일 뿐임을 알 수 있다.
누가 해방시킬 것인가? 누가 해방되어야 하는가? 를 묻는 것 만으로는 결코 충분치 않다. 비평은 세번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즉, 어떤 종류의 해방을 말하는 것이냐, 하는 물음이다. 요구하고 있는 해방의 본질적인 조건들은 무엇인가? 정치적 해방에 대한 비평 자체가 유대인 문제에 대해 유일한 최종 비평이다. 그리고 이의 순수 해결책은 ‘시대의 일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기도 하다.
바우어는 이 수준에서 문제를 공식화하지 않았기에 자기 모순에 빠졌다. 그는 조건을 정치적 해방의 본질에다 설정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그의 문제와 상관이 없는 문제들을 제기했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물었던 질문에 대해서는 해답을 주지 않는 문제들을 풀었다. 그가 유대인 해방의 반대자들에 대해 “그들의 잘못은 단순히 기독교 국가가 유일하게 참된 것이라고 전제하면서 이것을 유대교의 입장에서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10] 라고 말할 때 우리는 바우어가 “기독교 국가”만을 언급하고 “국가 일반”을 언급하며 비평을 하지 않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을 본다. 그는 여기서 정치적 해방과 인간 해방의 관계에 대해 규명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그가 정치적 해방과 보편적 인간 해방을 혼동하면서 드러낸 비판적 감각의 결핍 때문이라고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바우어는 유대인들에게 묻는다. “너희는 너희의 입장에서 정치적 해방을 요구할 권리를 갖는가?” 우리는 이것을 뒤집어서 새롭게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정치적 해방의 입장에서 유대인들은 유대교를 폐지하도록 요청 받을 수 있는가? 혹은, 인간은 종교 자체를 폐지하도록 요청 받을 수 있는가?
유대인 문제는 그 자체로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국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정치적 국가가 아닌, 그와 비슷한 어떤 국가도 아닌 독일에서는 유대인 문제가 순수하게 신학적이다.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국가에 대한 종교적 적대자가 된다. 왜냐하면 국가가 기독교를 근거로 선포됐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국가는 고백적인 신학자가 되고 비평은 여기서 신학 비평이 된다. 양날을 가진 비평으로서, 한편으로는 기독교 신학을, 다른 한편으로는 유대교 신학을 겨눈다. 이렇게 우리는 언제나 신학의 영역에 머물게 되지만 우리는 이 안에서도 비판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헌법 국가인 프랑스에서는 유대인 문제가 정치적 해방의 미완성이라는 헌법적인 문제가 된다. 여기서도 국가 종교와 비슷한 상황이 유지되기 때문에 오직 다수의 종교라는 무의미하고 자기 모순적인 형식 안에서 국가에 대한 유대인의 관계는 종교적 신학적 반대와 유사한 상황을 얻게 된다.
유대인 문제가 신학적인 의미를 잃고 진정한 세속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유일하게 북 아메리카나 최소한 그 중 몇몇 자유국가에서만 가능하다. 국가가 완벽하게 개발된 형태로 존재할 때만 유대인 및 종교인 일반의 정치적 국가에 대한 관계가 순수한 형태로, 본래의 성격 그대로 드러난다. 국가가 종교에 대한 신학적 태도 취하기를 멈출 때, 즉 국가가 국가로서의 태도를 취할 때, 다시 말하자면, 정치적인 태도를 취할 때, 이러한 관계에 대한 비평은 더이상 신학 비평이 되기를 멈춘다. 이때 비평은 정치 국가에 대한 비평이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 문제가 신학적이 되기를 멈추는 지점에서, 바우어의 비평은 비판적이 되기를 멈춘다.
“북 아메리카에는 국가 종교나 혹은 다수의 종교라고 선언된, 혹은 타종교에 대해 주류로서의 월권을 행사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종교라는 것은 없다. 국가는 모든 종교와 거리를 두고 있다.”[11]
북 아메리카의 어떤 국가는 심지어 “헌법이 정치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조건으로서 어떤 종교적 신념이나 행위도 요구하지 않는다.”[12] 더구나 “미국에서는 누구도 종교 없는 사람은 정직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이 없다.”[13] 그리고 북 아메리카는 뷰몽[14], 토크아빌[15], 영국인 해밀톤[16]등이 한 목소리로 이야기하 듯, 특별히 종교성이 강하다. 그러나 북 아메리카의 나라들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의 실례로서의 역할만 할 뿐이다.
문제는 이것이다. 도대체 완벽한 정치적 해방과 종교간의 관계는 무엇인가? 만약 우리가 완전한 정치적 해방을 획득한 나라에서 종교라는 것이 계속 존재할 뿐 아니라 오히려 새롭고 열렬하다는 것을 발견한다면, 이것은 종교의 존재라는 것이 결코 국가의 완전성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종교의 존재라는 것은 결함의 존재를 뜻하는 것이기에 결함의 근거가 국가 자체의 본질 속에서 밝혀져야 한다.
종교는 더이상 사회적 근거로서 나타나지 않는다. 하나의 세속적 편협성의 현상으로서 나타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 시민들에 대한 종교적 억압을 이들에 대한 세속적 억압으로 설명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그들의 세속적 한계를 제거하기 위해 종교적 편협성을 초월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이 일단 그들의 세속적 한계를 극복하면 그들의 종교적 편협성도 초월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세속 문제를 신학 문제로 전환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학 문제들을 세속 문제로 전환하려 하는 것이다. 역사는 충분히 오랜동안 미신으로 변형되어 왔다. 이제 우리는 미신을 역사로 변형코자 한다.
정치적 해방과 종교의 관계 문제는 우리에게 정치적 해방과 인간 해방의 관계 문제가 된다. 우리는 정치 국가의 종교적 실패에 대한 비판을 이들의 종교적 실패 자체는 무시하고 그것의 세속적 형태 속에서 정치 국가를 비판함으로써 수행한다. 우리는 인간적인 언어로 국가와 특정 종교, 예를 들면 유대교 간의 모순을 국가와 특정 세속적 요소들 간의 모순을 보여줌으로써, 국가와 종교 일반, 그리고 국가와 국가의 일반적 전제들 간의 모순을 보여줌으로써 표현한다.
유대인 혹은 기독교인, 종교적 인간 일반의 정치적 해방은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종교 일반으로부터의 국가의 해방이다. 국가가 스스로를 종교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은 국가의 본성을 따라 스스로를 국가 종교로부터 해방시키는 특별한 방식으로 수행한다. 다시 말하자면, 국가가 어떤 종교도 의식하지 않고 스스로를 순수하고 단순한 국가로 확립되면서 이러한 해방을 이룬다. 종교로부터 정치적으로 해방된다는 것은 종교로부터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해방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정치적 해방은 인간 해방의 최종적 절대적 형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적 해방의 한계는 인간이 스스로 자유로운 인간이 되지 못한 상태에서도 국가는 스스로를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다는 데서 곧바로 드러난다. 인간은 해방이 되지 못했어도 국가는 자유로운 국가가 될 수 있다. 바우어는그가 정치적 해방을 다음과 같은 조건에 의존한다고 봤을 때 암암리에 이점을 의식하고 있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모든 종교적인 특권과 그 특권을 누리고 있는 교회의 독점을 폐지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요구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 만약 소수나 혹은 다수의, 심지어는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자기들의 종교적 의무를 이행해야 겠다고 느낀다면, 이럴 경우는 그들에게 종교적 의무 이행이 절대적으로 사적인 일로서 치부되어야 할 것이다.”
이처럼 국가는비록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계속해서 종교적인 상태로 머물러 있다고 해도 스스로를 종교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다. 그리고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그들의 종교 행위를 사적인 일이 되도록 한다고 해도 여전히 종교적이 되기를 멈추지 못할 것이다.
국가, 특히 자유 국가의 종교에 대한 태도는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각 개인의 종교에 대한 태도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이정치적 방법으로 국가를 통해 자신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면, 이때 인간은 자기 한계를 자기 자신과 모순되는 방식으로, 그리고 추상적이고 협소하고 부분적인 방식으로 초월하게 된다. 더구나 인간은 자신을 정치적으로 해방시킴으로써 자신을 우회적인 방식으로, 매개자를 통해 해방시키는게 되는데, 이때 매개자는 필연적인 것이 된다.
최종적으로, 국가라는 매개를 통해 인간이 스스로를 무신론자로 선포한다고 해도, 즉 이 때 그는 국가 자체를 무신론자로 선포하는 경우지만, 이 때에도 그 자신은 여전히 종교에 매여있다. 왜냐하면 이 때 그는 자신이 무신론자라는 것을 국가라는 매개를 통해 간접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는 다만 인간이 간접 방식으로 인식한 것일 뿐이다. 국가는 인간과 인간의 자유 사이를 연결하는 매개자다. 마치 그리스도가 인간의 매개자가 되어 인간이 그에게서 그들의 모든 신성과 종교적 구속을 얻는 것처럼 국가 또한 매개자가 되어 인간이 그에게 모든 비신성과 인간적 자유를 위탁한다.
인간이 종교를 넘어서는 정치적 향상은 이처럼 모든 차원의 정치적 국면이 지니는 약점과 장점을 지닌다. 예를 들자면, 북 아메리카의 많은 주에서 그랬듯이, 선거인단과 대표자들을 위한 재산 자격을 폐지했을 때 국가는 국가로서 사유 재산을 폐지한 것이다(이 때 사람들은 정치적 방법에 의해 사유 재산의 폐지를 포고했다). 해밀톤은 이 상황을 정치적 입장에서 상당히 바르게 해석했다. “대중은 재산가들과 경제적 부에 대해 승리를 얻었다.”[17]무산자들이 유산자들을 위해 법을 만들 때 사유 재산은 이상적으로 폐지되지 않았던가? (선거를 위한)재산 자격 규정은 거기서 사유 재산에 대한 인식이 이뤄지는 마지막 정치 형태다.
그러나 사유 재산의 정치적 금지는 사유 재산을 폐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실제로 사유 재산의 존재를 전재 한다. 국가는 출생과 사회적 지위, 교육, 직업에 따라 주어졌던 모든 차별을 자의대로 폐지한다. 이 때 국가는 출생과 사회적 지위, 교육, 직업 등은 비 정치적 차별이라고 포고한다. 즉 국가는 이러한 차별을 염두에 두지 않고 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대중적 주권에서 동등한 파트너라고 선포한다. 그리고 국가는 국가의 실제 생활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을 국가의 입장에서 다룬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사유 재산과 교육, 직업 등을 나름대로 자의를 따라 가능하도록 허용한다. 즉 사유 재산이나 교육, 직업 등을 가지고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나타낼 수 있도록 허용한다.
이러한 실질적인 차이들을 폐지하는 것은 고사하고, 이들은 처음부터 전제가 되고 있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국가는 이러한 요소들을 반대할 때에 한해서만 정치 국가가 될 것을 의식하는 것이고 이의 보편성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헤겔은 그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을 때 종교에 대한 정치적 국가의 관계 규정을 썩 바르게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의 자의식적 윤리 실재로서의 국가가 존재하기 위해 근원적인 것은 권위의 형식과 신앙의 형식이 구별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별은 교회 영역 자체에서 분리가 나타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이것은 국가가 개별 교회를 넘어서서 국가의 형식적 원리로서의 사유의 보편성을 획득하고 이 보편성을 현실화하는 방식으로서만 가능하다.”[18] 확실히 그렇다! 오직 이런 방식에 의해서만 개별적인 요소들을 넘어서서 국가가 스스로를 보편자로 설정될 수 있을 것이다.
완벽한 정치 국가는 본질적으로 물질적 생활에 대립된 것으로 인류의 종생활(種的生命species-life) ‘종생활(species-life;Gattungsleben)’이란 용어는 포이엘바하에게서 빌려온 나온 말이다. 포이엘바하는 ‘기독교의 본질(Das Wesen des Christentum)’ 첫 장에서 인간의 본성에 대해 논하면서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인간의 ‘의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지니고 있는 특별한 종류의 의식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자신을 개인으로서 의식할 뿐 아니라 자신을 인류라는 종의 구성원으로 의식하며 자신과 마찬가지로 타자에게서도 똑같이 ‘인간적 본질’을 이해한다. 포이에르바하에 의하면 인간이 종을 의식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의 추리 능력에서 근본적인 요소다. “과학은 종-의식이다.” 마르크스는 용어의 이러한 의미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이것을 다른 맥락에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포이에르바하보다 더욱 강하게 주장하기를, ‘종-의식’이 인간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이고 인간이 본래적으로(즉 자기 본성을 따라) 살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의식적으로 ‘종-존재’로서 즉, 사회적 존재로서 살아가고 행동할 때라고 했다.[19]이다. 이러한 이기적 생활이 지니는 모든 종류의 전제들은 정치 영역 밖에 있는 시민 사회에 계속 존재한다. 정치 국가가 발전을 완벽하게 마치게 되는 곳에 인간은 사유나 의식에서 뿐 아니라 실재에서, 생활에서도 이중적-천상적, 지상적- 생활을 영위해 나간다. 정치 공동체에 살면서 인간은 스스로를 공동체적 존재로 여기고, 시민 사회에 살 때는 사적 개인으로서만 행동하고 타자를 수단으로 대하며, 스스로도 수단의 역할만 담당하는 존재로 격하시키면서 타자의 놀이개가 된다. 시민 사회와 관련해 정치 국가는 지상에 대한 천국과 마찬가지로 정신적일 뿐이다. 그것은 시민 사회에 똑같이 대립해 있고 종교가 속세의 편협을 극복하는 똑같은 방법으로 시민 사회를 극복한다. 즉, 정치 국가는 언제나 이것을 인지해야 하고 재정립 해야하고 또다시 스스로 이에 의해 지배 되도록 허용한다.
시민 사회에서 인간의 가장 적나라한 실재는 세속적 존재다. 바로 이곳, 인간이 스스로에게나 타자에게 진짜 개인인 듯이 여겨지는 이곳에서 인간은 하나의 가상적 현상이다. 그러나 반대로, 정치 국가에서 인간은 ‘종존재(species-being)’[20]로 여겨지고, 상상의 주권을 지닌 상상의 구성원이 되며, 그의 실제 개인 생활은 벗겨지고 비 현실적인 보편성을 입는다.
개인이 스스로를 특정 종교의 교수로서 자신의 시민적 자질을 관련짓고 타자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관련지으면서 생겨나는 갈등은 정치 국가와 시민 사회간의 세속적 분열로 환원시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부르조아[21]로서의 인간에게 “정치 국가에서의 생활은 정상적이고 본질적인 생활과 비교할 때 피상적일 뿐이거나 일시적인 예외일 뿐이다.” 사실 유대인 같은 부르조아가 정치 생활에 참여하는 것은 오직 궤변적인 방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마치 시토옌[22]으로서의 유대인 혹은 부르조아라는 것이 궤변적인 방법을 통해서만 가능하듯이.
그러나 이러한 궤변성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정치 국가 자체의 궤변성이다. 종교적 인간과 시민의 차이는 정확하게 가게 주인과 시민의 차이나, 일용 노동자와 시민의 차이, 지주와 시민의 차이, 혹은 일상의 개인들과 시민의 차이와 똑 같다. 종교적 인간이 정치적 인간에게서 느끼는 모순은 정확하게 부르조아가 시민에게서 느끼는 모순이나 시민 사회의 구성원이 정치적 사자의 껍데기에서 느끼는 모순과 똑 같은 것이다.
유대인 문제는 이러한 세속적 대립으로 환원된다. 이 대립은 정치 국가와 이의 전제들 간의 관계에서 생겨나거나, 혹은 그 전제들이 사유 재산 등과 같은 것으로서의 물질적 요소나 문화나 종교와 같은 정신적인 요소든 간에, 일반적 이익과 사적 이익 간의 갈등, 정치 국가와 시민 사회간의 분열 등과 같은 세속적 모순들이다. 하지만 바우어는 이들에 대해 다루지 않고, 유대인의 종교적 표현만을 문제 삼으며 논쟁을 끌어갔다.
“이것은 엄밀하게 다음과 같은 근거에서다. 즉 시민 사회의 존립을 보장하고 이의 필연성을 보증할 필요가 시민 사회의 존립을 끊임없는 위험속에 내 몰며, 시민 사회 안에 불확실성의 요소들을 유지시키며, 부와 가난, 번영과 퇴보의 끊임없이 변하는 합성물을 생산해 내며, 무엇보다도, 변화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23] 바우어가 쓴 글에서 “시민 사회”[24]라고 하는 제목 하의 부문 전체를 비교해 보면, 그가 얼마나 헤겔의 권리의 철학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면모들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정치 국가가 필연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에 정치 국가와 대립되고 있는 측면에서 또한 시민 사회도 필연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정치적 해방은 분명 커다란 발전을 뜻한다. 정치적 해방은 인간 해방의 최종적인 형태가 확실히 아니다. 그러나 정치적 해방은 유력한 사회 질서의 틀 안에서 인간 해방의 최종적인 형태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 실제의 실천적 해방을 말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인간은 종교를 공적 영역의 법에서 사적 영역의 법으로 추방함으로써 종교로부터 정치적으로 해방될 수 있다. 종교는 더이상 국가의 정신이 아니다. 국가 안에서 인간은, 비록 특별하고 제한된 방식으로, 그리고 개별적인 영역에서이기는 하지만, ‘종적 존재’로서 행동하며 타자와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간다.
종교는 시민 사회의 정신, 이기주의 영역의 정신, ‘만인을 향해 만인이 투쟁하는(bellum omnimum contra omnes) 영역’의 정신이 되었다. 종교는 더이상 공동체의 본질이 아니라 소외의 본질이다. 종교는 그것이 시작되었을 때의 상태가 됐다. 종교의 시작이란 인간이 공동체와 자신, 타자로부터 분리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표현이다. 종교는 이제 개인적인 어리석음, 사적인 일탈이나 변덕에 대한 추상적 공인일 뿐이다.
예를 들어, 북 아메리카에 엄청난 종교적 분열은 이미 종교라는 것을 철저한 사적인 일로서 여기기 위한 외적 형식을 부여하고 있다. 종교는 무수한 사적 이해 관계들과 그러한 이해들이 얽힌 공동체 생활로부터 추방당한 사람들 사이에 유효한 것으로 격하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해방의 의미에 대해 착각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다. 인간이 공적 개인과 사적 개인으로 분리된 것, 종교가 국가에서 시민 사회로 전위된 것 등은 모두 정치적 해방의 단계가 아니라 정치적 해방이 이룩해 낸 성취라는 것이다. 이처럼 정치적 해방은 인간의 실제 종교성을 폐지하지 않을 뿐 아니라 폐지하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유대인을 시민으로 해체하는 일, 개신교도를 시민으로, 종교인을 시민으로 해체하는 일은 정치 체제에 거스리는 기만도 아니고 정치적 해방을 위한 핑게도 아니다. 이것은 정치적 해방 자체다. 종교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정치적 양상이다.
분명한 것은, 그러한 정치 국가가 시민 사회에 태동될 때 국가는 종교의 폐지를 추진 할 수 있고 또 추진 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추진은 사유 재산 전체를 몰수하거나, 혹은 좀 전향적 방식의 과세를 통해, 혹은 단두대를 가지고 생명을 끝장내는 것과 똑 같은 방식으로 추진해야 한다. 국가가 가장 첨예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을 때 정치 생활은 국가 자체의 기초 조건들인 시민 사회와 그 요소들을 질식케 하면서 스스로를 인류의 가장 순수하고 조화로운 종생활(species-life)로서 확립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국가가 이러한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국가가 자체의 존립 조건에 과격하게 대립하면서 영원한 혁명을 선포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이렇게 정치적 드라마는 필연적으로 종교와 사유 재산, 그리고 모든 시민 사회의 요소들을 회복함으로써 끝나게 되어있다. 마치 전쟁이 평화로 결말을 짓듯.
사실 완벽한 기독교 국가는 기독교를 국가의 기초로, 즉 국가 종교로 인정하고 타 종교에 대해 배타적 태도를 취하는 그런 국가가 아니다. 완벽한 기독교 국가는 오히려 무신론적이고 민주적인 국가로서 기독교를 시민 사회의 한 요소로 위상을 낮춘다. 여전히 신학적인 국가, 공식적으로 여전히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국가, 그리고 아직도 감히 국가라고 스스로를 선포하지 못하는 국가는, 지금까지 한번도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형식으로 정치적 현실 속에서 인간의 근본에 대해 성공적으로 표현해 본적이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 자체가 이러한 인간의 근본에 대한 초월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기독교 국가라는 것은 국가가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기독교는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아니라 철저한 인위에 의해 실현될 수 있는 기독교 종교의 인간적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기독교 국가는 국가의 기독교적 부정일 뿐 결코 기독교의 정치적 실현이 아니다. 기독교를 종교로 고백하고 있는 국가는 아직 기독교를 정치적인 형식으로 고백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아직 종교에 대해 종교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자면, 이러한 국가는 종교의 인간적 근본을 순수하게 구현한 실체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러한 인간적 본질에 대해 아직도 비현실적인 상상의 형식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기독교 국가는 불완전한 국가다. 이를 위해 기독교 종교가 보조 역할을 하고 있고 그 불완전성을 거룩하게 포장하고 있다. 이렇게 종교는 필연적으로 수단의 하나로 전락하게 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른바 기독교 국가는 위선적 국가라는 것이다.
완전한 국가라는 것이 국가의 일반적인 본질상의 결핍 때문에 종교를 하나의 전제 조건으로 여긴다는 것과, 불완전한 국가가 불완전한 국가로서의 특별한 조건상의 결핍 때문에 종교를 국가의 근거로 선포한다는 것, 이 두가지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후자의 경우, 종교는 불완전한 정치가 된다. 전자에서는, 완전한 정치임에도 그의 불완전이 종교 안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른바 기독교 국가는 스스로를 국가로서 완전케 하기 위해 기독교 종교가 필요하다. 민주 국가, 즉 참된 국가는 이의 정치적 완성을 위해 종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반대로 이들은 종교가 없어도 된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 종교의 인간적 핵심이 세속적 방식으로 실현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이른바 기독교 국가는 종교에 대해 정치적 태도를 지니고 정치에 대해 종교적 태도를 지닌다. 이들은 정치 제도들이나 종교를 똑같이 허수아비로 만든다.
이러한 모순을 보다 분명하게 인식하기 위해 바우어가 사용하고 있는 기독교 국가의 모델을 살펴보겠다. 그가 사용한 모델은 자신의 독일-기독교 국가에 대한 연구로부터 가져온 것이다.
바우어가 말했다. “아주 최근에 기독교 국가의 불가능성 혹은 비실재성을 증명하기 위해 그러한 성경 구절들이 종종 인용되어 왔는데, 이것들은 국가가 스스로 완전하게 와해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결코 순응하거나 순응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성서 구절들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초자연적 체념, 계시에 대한 복종, 국가에 대한 외면, 세속적 조건들의 폐지 같은 것이 아닌가. 그러나 기독교 국가는 이러한 모든 것들을 선포하고 완수한다. 기독교 국가는 성경의 정신에 융합되었다. 그리고 만일 기독교 국가가 성경의 정신을 정확하게 성경 자체의 의미 맥락에서 재생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이 정신을 정치적 방식으로 표현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이 세상의 정치 제도로부터 빌려 온 것인데, 모두가 종교적 거듭남 안에 놓일 것들로서, 단순한 외양에 불과한 것들이다. 인간은 국가를 외면하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정치 제도들은 실현되고 완성될 것이다.”[25]
바우어는 계속해서 기독교 국가의 구성원들은 더이상 그들의 의지로 국가를 구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국가는 그것을 지배하는 지도자에 의해 실질적인 존립형태를 갖는다. 그러나 국가의 지도자는 그 기원과 본성이 국가에 대해 비친화적이다. 왜냐하면 그는 국민이 뽑아 세운 지도자가 아니라 신에 의해 지도자로서 위임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가의 법은 국가가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신으로부터의 직접적인 계시들이다. 최고 지도자는 실질적 국가인 일반 대중과의 관계에서 특권적 매개자가 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국가 자체는 여러가지의 서로 다른 영역으로 분해된다. 이 영역들은 우연에 의해 형성되고 결정되며, 각자의 이익을 따라, 각자의 구체적인 열정과 편견을 따라, 각자로부터 소외되고 분리된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의 특권으로서 각자로부터 스스로 고립될 수 있는 허가를 획득한다.[26]
그러나 바우어는 스스로 이렇게 말한적도 있다. “정치라는 것이 만일 종교와 다를 바가 없다면 그것은 정치가 될 수 없다. 만일 냄비 닦는 일과 같은 것이 종교적인 일로 취급된다면 종교는 일상 가사일로 여겨져야 하는 것과 같다.”[27] 그러나 독일 기독교 국가에서 종교는 “경제적인 일”이다. 마치 “경제적인 일”이 종교인 것처럼. 독일 기독교 국가에서 종교의 권력은 권력의 종교이기도 하다.
“성경의 정신”을 “성경의 글자”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비종교적인 행위다. 국가가 성서를 정치의 글자로 표현하거나 혹은 성령의 것이 아닌 다른 글자로 표현하는 행위는, 만약 인간의 눈으로서는 아닐 찌라도 최소한 자체 종교의 눈으로 봤을 때, 명백한 신성모독 행위다. 성경을 자체의 헌장으로 여기고 기독교를 최고의 법으로 여기는 국가는 성경의 말씀들을 따라서 평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의 언어 조차 거룩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가는, 그 위에 자리를 잡고 있는 모든 인간적인 잡동사니들도 마찬가지로 , 스스로 완전히 해체되기를 원치 않는 한 준수해서도 안되고 준수할 수도 없는 것들을 성경 말씀으로 강요할 때, 종교적 양심의 입장에서 도저히 풀 수 없는 그런 고통스런 모순에 스스로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왜 이들은 스스로 완전히 해체되기를 원치 않는 것인가? 국가는 스스로도 그렇고 누군가도 역시 이 물음에 답할 수 없다. 이들의 의식에는 공식적인 기독교 국가는 결코 이룰 수 없는, 하지만 이뤄야 할 의무(ought)다. 국가는 스스로를 속이지 않으면 자신이 맞고 있는 현실의 실재를 긍정할 수 없다. 그렇기에 이들의 눈에는 언제나 의심의 대상과 불확실하고 문제 많은 대상들만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판은 비판 자체의 권리를 통해 성경 위에 지탱하고 있는 국가가 스스로 망상에 사로 잡혀 있는지 아닌지를 더이상 알 수 없는 사유의 혼란 속에 빠지도록 몰아간다. 여기서 국가의 세속적인 목적은(이 목적을 위해 종교가 하나의 가면 역할을 한다) 국가의 종교적 의식의(이를 위해 종교가 세계의 목표로 등장한다) 신실함이 요구하는 것과 해결 될 수 없는 갈등 안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국가가 그 내적 고뇌를 해결하는 것은 가톨릭 교회의 충복이 되는 길 뿐이다. 세속 권력은 철저히 교회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가톨릭 교회 앞에 국가는 무력하다. 종교 정신의 법이 될 것을 요구하는 세속 권력은 무력할 수 밖에 없다.
이른바 기독교 국가 안에 팽배한 것은 인간이 아니라 소외다. 국가 안에서 유일하게 인정되고 있는 인간인 왕은 특별히 모든 인간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그리고 여전히 하늘과 하나님과 교통하는 유일한 종교적 인간이다. 여기서 존재하는 관계는 여전히 신앙에 기초한 관계다. 종교 정신은 아직도 제대로 세속화되지 않았다.
그러나 종교 정신은 제대로 세속화 될 수 없다. 인간 정신의 발전에서 비세속적 형태의 단계 이외에 무엇이 있는가? 종교 정신은 그것이 종교적 형태로 표현하고 있는 인간 정신의 발전 단계가 세속적 형태 안에서 나타나고 그 안에서 형성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 이러한 일이 민주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다. 국가의 근거는 기독교가 아니라 기독교의 인간적 근거다. 종교는 이때 이상으로, 구성원의 비세속적 의식(意識)으로 남는다. 왜냐하면, 이때 종교는 인간이 여태까지 도달한 발달 단계의 이상적 형태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국가의 구성원은 개인 생활과 종적 생활, 즉 시민 사회와 정치 생활의 이원성 때문에 종교적이다. 이것을 종교적이라고 하는 의미는 인간이 정치 생활을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생활과 별도의 것으로, 마치 이것이 진정한 생활인 것처럼 취급한다는 점에서다. 그리고 종교는 여기서 시민 사회의 정신이고, 종교는 인간으로부터 인간의 분리와 배제를 표현하고 있다는 의미에서다.
정치적 민주주의는 기독교적이다. 이것은 정치적 민주주의 안에서의 인간은, 어떤 한 인간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주체적인 존재, 최고의 존재가 된다는 의미에서다. 그러나 거기서의 인간은 교육되지 않았고 비사회적인 인간이며, 우연적 실존 안에서의 인간이다. 우리 사회의 전체 조직에 의해 타락됐고, 자신을 잃어버렸고 소외된, 비인간적 조건과 요소들의 법칙을 따라야 하는 인간, 간단히 말하자면, 참된 종존재가 아직 아닌 그런 인간이다. 환상과 꿈의 창조, 기독교의 당연한 전제, 인간의 주권-이 때 인간은 아직 참된 인간이 아닌 그런 인간-이런 모든 것들이 민주주의에서 만질 수 있는 유형자산이 되고 현재적 실재가 되며 세속적 공리들이 된다.
완성된 민주주의에서 종교적이고 신학적인 의식은 더욱 더 종교적이고 신학적이 된다. 이때 종교는 명백하게 그 어떤 정치적 의미나 현세적 목적이 되지 않고 세상으로부터 동떨어진 마음의 일이되고, 이성의 한계에 대한 표현이 되고,
환상과 독단의 산물이 되고, 피안에서 누릴 확실한 생명이 된다. 여기서 기독교는 보편적인 종교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실제적 표현을 얻는다. 왜냐하면 가장 다양한 견해들이 모두 기독교라는 형태로 한 데 묶어지며, 더구나 기독교는 이제 더이상 누구에게도 기독교 신앙의 고백을 강요하지 않고, 다만 어떤 종류의 종교든 가져야 한다는 것 만을 요구하게 되기 때문이다(앞에서 인용한 뷰몽을 보라). 종교적 의식은 온갖 종류의 모순과 다양함을 갖추고 범람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로부터의 정치적 해방은 비록 특권적인 형태는 아니지만 종교를 존립케 한다는 것을 이야기했던 것이다. 특정 종교의 신봉자가 자신의 시민권과 관련해 발견하게 되는 모순은 다만 정치적 국가와 시민 사회 간의 보편적 세속적 모순의 한 국면에 지나지 않는다. 기독교 국가의 완성은 국가가 스스로를 하나의 국가로서만 의식하고 그 구성원들의 종교에 대해서는 아예 무시하는 그런 국가다. 종교로부터 국가의 해방은 종교로부터 참된 인간을 해방하자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대인에게 바우어가 그랬던 것처럼, 너희는 스스로 유대교로부터 완전하게 해방되지 않으면 정치적으로 해방될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너희가 유대교를 완전하게 부인하지 않고도 정치적으로 해방될 수 있기 때문에 정치적 해방 자체는 인간적인 해방이 아니라고 말한다. 만약 너희들이 인간적으로 해방되지 않고도 정치적으로 해방되기를 원한다면 그 부적절함과 모순성은 너희들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해방 자체의 본성과 범주가 지니는 문제다. 만약 너희들이 이러한 범주에 미리 사로잡혀 있다면 너희들은 일반적인 편견을 공유하는 셈이다. 국가가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유대인들에 대해 취하는 태도를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들도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시민적 권리를 요구하며 정치적으로 행동한다.
그러나 한 인간이, 그가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해방 될 수 있고 시민의 권리를 획득할 수 있다면, 그는 소위 인간의 권리라는 것을 요구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인가? 바우어는 이것을 부정했다. “문제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 자기는 본성상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어 살아 가도록 강요되었다고 공언하고 있는 그러한 유대인이, 과연 인간의 보편적 권리를 얻을 수 있고 타인들의 그것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인지의 문제다.”
“인간의 권리라는 관념은 지난 세기 기독교 세계에서만 발견되었다. 그것은 본유적 관념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그 안에서 교육되어왔던 역사적인 전통들에 대한 투쟁을 통해 획득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권리는 자연의 선물도 아니고 과거 역사로부터의 유산도 아니다. 그것은 출생의 우연적 사건에 대항한, 그리고 역사가 지금까지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이해 왔던 특권들에 대항한 투쟁의 대가다. 그것은 문화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오직 그것을 위해 공을 끼쳤고 획득에 참여했던 이들만 그것을 소유할 수 있다.”
“그러나 유대인이 실제로 그것들을 소유할 수 있는가? 그가 유대인으로 남아있는 한, 그를 유대인으로 만들게 하는 제한적 본성이 그를 인간으로서 편입케 하는 모든 인간적 본성을 눌러 이길 것이다. 그리하여 그 제한적 본성은 유대인이 아닌 모든 사람들로부터 스스로 분리될 것이다. 유대인은 이러한 분리를 통해 자신을 유대인으로 만드는 특별한 본성이 자신의 참된 최고의 본성이며 이 앞에서 인간적 본성은 소멸되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마찬가지로, 이와같은 생각을 가진 기독교인들도 인간의 권리를 부여받을 수 없다.”[28]
바우어에 의하면 인간은 인간의 일반적 권리를 얻기 위해 “신앙의 특권”을 희생해야 한다. 여기서 일컬어지고 있는 인간의 권리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것을 가장 본래적인 형식에서, 즉 이것을 발견한 북 아메리카와 프랑스 사람들에게서 검증해 보자. 이러한 인간의 권리들은 부분적으로 정치적 권리들로서 한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어야만 발휘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들의 권리 내용은 공동체 생활, 공동체의 정치 생활, 국가의 생활에의 참여다. 이들은 정치적 자유의 범주, 시민의 권리의 범주에 드는 것들로서, 우리가 이미 살펴봤듯이, 결코 종교의 일치나 긍정적인 폐지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 결국 유대교에 대해서도 마찬 가지다. 이것은 다른 부분에 대해서, 즉 시민의 권리와는 구별되는 것으로서의 인간의 권리들에 대해서도 생각할 여지를 남기고 있다.
이들 가운데 양심의 자유라는 것이 발견된다. 이것은 선택된 종교를 믿을 수 있는 권리다. 신앙의 특권은 인간의 권리로서, 그리고 인간의 권리의 결과로서, 즉 자유의 결과로서 수사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1791년에 선포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10조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누구도 자신의 견해에 대하여, 종교적 견해까지도, 방해를 받지 않는다.” 이렇게 여기서 “자기가 신봉하는 종교를 믿을 수 있는 모든 사람의 자유”가 인간의 권리들 가운데 하나로서 보장되고 있다.
1793년판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은 제 7조에서 인간의 권리들 가운데 “종교적 준수의 자유”를 그중 하나로 열거하고 있다. 더구나 사상과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권리, 집회를 열 수 있는 권리와 종교를 믿을 수 있는 권리와 관련하여 “이러한 권리들을 천명할 필연성은 독재의 존재나 최근의 독재에 대한 기억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 언급되고 있다. 1795년의 헌법 제12부 354조를 비교해 보라.
펜실바니아 헌법 제 9조 3항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양심의 지시에 따라 전능자를 예배할 수 있는 불가침의 권리를 자연으로부터 받는다. 그리고 누구도 합법적으로 자신의 의지에 반해 어떤 종교나 종교적 행위를 따르거나 설치하거나 혹은 지지하도록 강요할 수 없다. 어떠한 인간적인 권위도 어떤 상황에서건, 양심의 일을 침해하거나 영혼의 힘을 조정할 수 없다.”
뉴 햄프셔 헌법 5조와 6조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자연적 권리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본성상 빼앗길 수 없는 절대적인 것들이 있다. 이들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양심의 권리가 그런 권리들 가운데 있다.”[29]
종교와 인간의 자유 간의 상반성은 인간의 자유 개념 안에 거의 표현되지 않고, 자기 성향에 따라 종교적일 수 있는 권리, 그리고 자신의 고유한 종교를 믿을 수 있는 권리가 수사적으로 인간의 권리들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 신앙의 특권은 인간의 보편적 권리다.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 간의 차이가 드러난다. 시민으로 구분될 수 있는 인간이란 누구인가? 그것은 시민 사회의 구성원 이외에 누구도 아니다. 왜 시민 사회의 구성원을 ‘인간’으로 부르는가? 왜 단순히 인간이며 왜 그의 권리를 ‘인간의 권리’라고 부르는가? 어떻게 이 사실이 설명될 수 있는가? 이것은 정치적 국가와 시민 사회의 관계에 의해, 그리고 정치적 해방의 본성에 의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우선 소위 ‘인간의 권리들’이라는 것을 시민의 권리와 구분되는 것으로서 주의 기울여 살펴보면, 이것이 단순히 시민 사회의 구성원의 권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타인과 공동체로부터 분리된 이기적 인간의 권리다. 1793년의 가장 급진적인 헌법인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2조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러한 권리들(자연적 권리와 불가침의 권리등)은 평등, 자유, 안전, 재산이다.
자유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6조에 나온다. “자유는 인간이 타인의 권리를 해롭게 하지 않는 어떤 것도 행할 수 있는 힘이다.”
그러므로 자유는 타자의 권리를 해롭게 하지 않는 어떤 것도 행할 수 있는 권리다. 각 개인이 타인을 해롭게 하지 않는다는 범위의 제한이, 마치 한 막대기로 두 영역 사이를 표시하는 경계 같은 것으로서, 법으로 결정됐다. 이것이 자기 자신 속으로 갇혀버린 고립된 유목민 같은 존재로 이해될 수 있는, 인간의 자유가 안고 있는 문제다.
바우어는, 왜 유대인들은 인간의 권리를 얻기에 적합하지 않은가? 를 물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가 유대인으로 남아있는 한, 그를 유대인으로 만들게 하는 제한적 본성이 그를 인간으로서 편입케 하는 모든 인간적 본성을 눌러 이길 것이다. 그리하여 그 제한적 본성은 유대인이 아닌 모든 사람들로부터 스스로 분리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권리로서의 자유는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에 기초되지 않았고 인간과 인간 간의 분리에 기초되었다. 그것은 그러한 분리의 권리다. 그것은 경계가 제한된 개인의 권리이고, 자신 속으로 갇혀버린 존재의 권리다.
자유의 권리의 실질적인 적용은 사유 재산의 권리다. 사유 재산의 권리는 무엇으로 구성되었는가?
1793년 헌법 제 16조: “재산권은 자기 뜻을 따라 자신의 노동과 산업의 열매인 물건과 수입을 즐기고 처분하는 모든 시민에게 속한다.”
그러므로 재산권은 자기 재산을 즐길 수 있고 이것을 자기 뜻을 따라 처분할 수 있는 권리다. 이것은 타인을 고려하지 않고 사회로부터도 독립된 권리다. 즉, 자기 이해의 권리다. 이러한 개인적 자유와 이의 적용이 바로 시민 사회의 기초를 구성한다. 이러한 자유는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타인을 이해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유의 제한으로 바라보게 한다. 이 자유는 무엇보다 “자기 뜻을 따라 자신의 노동과 산업의 열매인 물건과 수입을 즐기고 처분할 수 있는” 권리를 선언한다.
평등과 안전의 권리들이 남아있다.
‘평등’이라는 말은 여기서 아무런 정치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이것은 다만 위에서 규정한 자유에 대한 동등한 권리다. 즉, 모든 인간이 동등하게 자기 충족적인 유목민으로 여겨지고 있다. 1795년의 헌법은 자유의 개념을 이런 의미에서 규정한다.
1795년 헌법 제 5조. “평등은 법이 만인에게 그들을 보호하거나 벌할 때 똑같이 적용된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러면 안전은 무엇인가? 1793년 헌법 제 8조: “안전은 사회의 각 구성원에게 그들의 인격과 권리들과 재산을 보존하도록 사회가 제공하는 보호 속에 존재한다.”
안전은 시민 사회의 최고 사회적 개념인 경찰 개념이다. 전체 사회는 각 구성원들에게 그들의 인격과 권리들과 재산의 보전을 보장하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헤겔이 시민 사회를 ‘필요와 이유의 국가’로 부른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다.
안전 개념은 시민 사회를 이의 이기주의를 넘어서도록 할 만큼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안전은 이의 이기주의에 대한 보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상에서 살펴본 어떤 인간의 권리도 시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이기적 인간을 넘어서지 못한다. 공동체로부터 분리되어 자기 자신 속에 같힌 개인, 자신의 사적 이해에 철저히 사로잡혀있고, 자신의 사적 변덕에 따라 행동하는 그런 인간을 넘어서지 못한다. 인간의 권리 속에서 인간은 종적 존재로 이해되는 것과는 너무나 동 떨어져 있다. 오히려 여기서는 종적 생명 자체인 사회가 개인에 대한 외연적 제도로 여겨지고 자기의 본래적 독립의 한계로 여겨진다. 인간과 인간을 묶어주는 유일한 유대는 자연적 필연성에 해당하는 필요와 사적 이해, 자신의 재산과 이기적 인격의 보존 뿐이다.
이제 갓 해방되어 인민의 서로 다른 분야 간의 장벽을 허물고 정치적 공동체를 확립한 한 국가가 자기 동료들과 공동체로부터 분리된 이기적 인간의 권리들을 확고하게 선포해야 했다는 것(1791년의 선언), 그리고 이제 다시 가장 영웅적인 헌신이 나라를 구할 수 있는(그래서 긴급 상황으로 요청되는) 순간이 되었음에도, 그래서 시민 사회의 모든 이해 관계의 희생을 묻고 이기주의가 범죄로 처벌 받게 되어야 하는 때가 되었음에도, 이러한 선포를 반복해야 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기 어렵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1793).
정치적 해방자들은 시민, 정치적 공동체를 소위 인간의 권리라는 것을 보존키 위한 수단으로 평가 절하시켰다. 결국 시민은 이기적 ‘인간’의 하인으로 전락한 것이다. 여기서 종적 존재로서 기능하는 인간의 영역은 부분적 존재로 기능하는 수준으로 전락하고, 최종적으로 시민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유산자로서의 인간 만이 참되고 본래적인 인간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런 것들을 관찰하게 되면 사태는 더욱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모든 정치적 연합의 목적은 자연적이고 불가침적인 인간의 권리들을 보존하는 것이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1791 제 2조). “정부는 인간의 자연적 불가침적 권리의 향유를 보장하기 위해 설립됐다.”(선언, 1793년 제 1조). 이처럼 역사적 상황의 힘에 의해 열기를 더해 가던 젊은 열정의 시기에 조차 정치적 생활 자체가 시민 사회 생활이 그 목적이 되는 하나의 수단으로 절하되어 선언됐다.
혁명의 실천이 이론에 비추어 말이 안되는 모순에 놓여있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한 예로, 안전이 인간의 권리 중 하나로 선언되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서신왕래의 사생활 침해가 공개적으로 고려되기도 했다. ‘신문의 무한한 자유’가 개인의 불가침적 자유로 보장되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신문이 공적 자유를 위태롭게 하면 신문의 자유는 허용될 수 없다’[30]는 것 때문에, 신문의 자유가 완전히 파괴되기도 했다.
급기야 자유를 위한 권리는 그것이 정치적 생활과 갈등을 갖는 순간 권리가 되기를 멈춘다는 말이 나오게 됐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정치적 생활은 인간의 권리, 즉 개인적 인간의 권리 보장 이상의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 생활은 그것의 목적인 인간의 권리와 대립되는 순간 유예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이 법칙이면서도 실제는 항상 예외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비록 혁명적 실천을 이러한 관계에 대한 정확한 표현으로 인정한다고 해도, 왜 정치적 해방자들의 마음 속에 그 관계가 반대로 뒤집혀서 목적이 수단이 되고 수단이 목적이 되었던 것인가? 라는 문제가 계속 남을 것이다. 비록 심리학적이고 이론적이기는 해도, 의식의 이러한 착시는 항상 문제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쉽게 풀린다.
정치적 해방은 동시에 군주의 통치와 소외된 민중의 정치 생활이 자리잡고 있던 구 사회의 해체를 뜻한다. 정치적 혁명은 시민 사회의 혁명이다. 구 사회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성격을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봉건주의다. 구 시민 사회는 직접적인 정치적 성격을 지녔다. 즉, 재산과 가족, 직업과 같은 시민 생활의 요소들이 영주, 카스트, 길드와 같은 형식 안에서 정치적 생활의 요소들로 키워져 왔다. 그들은 이런 형식으로 전체로서의 국가에 대한 개인의 관계를 결정했다. 즉 이런 형식으로 개인의 정치적 상황, 혹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개인이 사회의 다른 요소들로부터 분리되고 배제되는 상황이 결정되었다.
국가적 생활 전체의 이러한 편제는 재산과 노동을 사회적 요소로서 구성하지 않는다. 이 편제는 국가의 몸통으로부터 이러한 요소들을 성공적으로 분리했고 이러한 요소들을 사회 안에서 서로 구별되는 사회들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봉건적 의미에서, 시민 사회의 역동적 기능과 조건들은 정치적인 상태로 남아있다. 그들은 개인을 국가의 몸통으로부터 배제했고 개인이 맺고 있는 단체와 국가 간의 관계를 개인과 사회 생활 간의 일반적 관계로 변형시켰다. 이것은 마치 그들이 개인의 특수한 시민 활동과 상황을 일반 활동과 상황으로 변형시킨 것과 같다. 이러한 편제의 결과로 전체로서의 국가와 국가의 의식, 의지와 활동은, 즉 정치력 일반이 필연적으로 지배자와 그의 종복들의 사적인 업무로 여겨지게 됐고 인민들로부터 분리됐다.
정치적 혁명은 지배자의 이러한 권력을 박탈했고 국가의 업무를 인민의 업무로 만들었다. 그리고 정치적 국가를 일반적 관심사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국가는 필연적으로 모든 것들, 사유지, 단체, 길드, 그리고 온갖 특권들을 분산시키게 됐는데, 이것은 공동체 생활로부터 인민들의 분리를 의미했다. 그러므로 정치적 혁명은 시민 사회의 정치적 성격을 폐지했다. 그리고 시민 사회를 그것의 기초 요소들로 분해했다. 한편으로는 개인들로,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개인들의 생활 경험과 시민적 상황을 구성하는 물질과 문화적 요소들로 분해했다. 봉건사회의 다양한 계급 구조 안에 녹아져 있고 파편화 되어있고 상실되어 있던 정치 정신을 해방시켰다. 흩어져 있던 파편들을 모아 재구성했고, 정치 정신을 시민 생활과의 관계로부터 해방시켰고, 그리고 이것을 공동체의 영역, 원리적으로 시민 생활의 이러한 특수 요소들로부터 독립된, 인민의 일반 관심의 영역으로 만들었다.
생활에서의 구체적인 활동이나 상황은 더이상 개인적인 의미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 이런 것들은 더이상 개인과 국가 전체 간의 일반적 관계를 구성하지 않는다. 그러한 것으로서의 공식적인 일들은 이제 각 개인의 일반적인 일들이 되었고 정치적 기능들은 일반 기능들이 되었다.
그러나 국가 이상주의의 완성은 동시에 시민 사회의 물질주의의 완성을 뜻하는 것이었다. 시민 사회의 이기적 정신을 억누르고 있던 구속은 정치적 멍에와 함께 제거됐다. 정치적 해방은 동시에 시민 사회의 정치로부터의 해방이었고 심지어는 정치 비슷한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이기도 했다.
봉건 사회는 그 사회의 기초 요소인 인간으로, 그러나 이기적 인간으로, 분해됐다. 이기적 인간은 봉건 사회의 진정한 기초였다.
인간은 이런 관점에서, 시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이제는 정치적 국가의 기초이고 전제 조건이다. 인간의 권리라는 것 속에서 인간은 그런 류의 인간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기적 인간의 자유와 그러한 자유에의 인정은 차라리 문화적 물질적 요소들의 광분한 운동에의 인정이었다. 이것들이 이제 인생의 내용을 채우게 됐다.
이처럼 인간은 종교로부터 해방되지 못했다. 그는 종교적 자유를 얻은 것이다. 그는 재산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했다. 그는 재산의 자유를 얻은 것이다. 그는 사업의 이기주의로부터 해방되지 못했다. 그는 사업에 종사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것이다.
정치적 국가의 형성과 시민 사회의 독립적 개인들(이들의 관계는, 단체에 속한 사람들과 길드 간의 관계가 특권에 의해 조절되었던 것처럼, 법에 의해 조절되는데)로의 분해는 하나의 그리고 동일한 행위에 의해 성취됐다.
시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인간은, 비정치적 인간으로서, 필연적으로 자연인으로 여겨지게 된다. 인간의 권리는 자연적 권리로 여겨지게 되는데, 이것은 의식적 행위가 정치적 행위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이기적 인간은 분해된 사회로부터 주어진 수동적 결과이며, 직접 이해의 대상이며 그렇기에 자연적 대상이다. 정치적 혁명은 시민 사회의 요소들 자체를 혁명화 하지 않고, 혹은 그들을 비판대 위에 올리지 않고, 시민 사회를 그 요소들에로 분해시켰다.
정치 혁명은 시민 사회를 인간적 필요와, 노동, 사적 이해와 시민 법의 영역으로, 인간 자신의 실존의 근거로서, 그리고 생존을 위한 전제 조건으로서, 그렇기 때문에 이처럼 자연적 근거로서, 이해했다. 마지막으로, 시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인간은, 시민과는 다른 인간으로서의, 본래적 인간과 동일화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감각적이고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실존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정치적 인간은 다만 추상적이고 인위적인 인간, 비유적이고 도덕적인 인격체로서의 인간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실제 인간은 이기적 인간의 형식 안에서만 이해되고, 참된 본성을 지닌 인간은 오직 추상적 시민의 형식 안에서만 이해된다.
정치적 인간의 추상적 개념은 루소에 의해 잘 정리되었다.
“감히 인민의 제도를 만들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스스로가 소위 인간 본성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마음을 먹어야 한다. 따로 떨어져서는 완벽한, 그러나 스스로 전체로서의 외톨이인 각 개인들을 자기보다 위대한 어떤 것의 한 부분으로의 존재로 변형시킬 수 있다고 마음을 먹어야 한다. 그는 이러한 각오로부터 자기 삶과 (이러한 목적을 강화키 위해 인간 본성을 변화시키는) 자신의 존재를 영위하며, (우리 모두에게 자연에 의해 주어진)물리적이고 독립적인 생활 대신에 제한되고 도덕적인 존재로서 살아간다. 그의 임무는, 간단히 말해서, 인간에게서 권력을 빼앗고 대신에 타자의 도움만을 받을 수 있는 낯선 권력을 그에게 돌려주는 일이다.”[31]
모든 해방은 인간 세계와 인간 자신에 대한 인간적 관계의 회복이다.
정치적 해방은 인간을, 한편으로는, 시민 사회의 구성원으로, 즉 독립적이고 이기적인 개인으로 환원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민으로, 즉 도덕적 인격으로 환원시킨다.
인간적인 해방이 완성되는 것은 실제의 개인이 추상적 시민으로 흡수되는 때에만 가능하다. 이것은 인간이 개인적 인간으로서, 일상 생활에서, 일 속에서, 그리고 모든 관계 속에서, 종존재(species-being)가 될 때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의 권력을 이해하고 사회적 권력으로 조직해서 더이상 이러한 사회적 권력이 정치적 권력으로서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도록 하는 때다.
2. 부르노 바우어, “오늘날의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해방될 수 있는 능력”[32]
바우어가 유대교와 기독교 종교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또한 현대적 비판에 대한 이들의 관계에 대해 연구한 것은 바로 이러한 형식에서다. 이 후자의 관계는 그들의 ‘해방될 수 있는 능력’과의 관계다.
그는 이렇게 결론을 지었다. “기독교인은 스스로를 조금만 높여서 자기 종교를 넘어서야 한다. 그래서 종교 일반을 폐지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해방이 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다르다. 그들은 그들의 유대인적 본성 자체를 깨뜨려야 할 뿐 아니라 자기 종교의 성취를 향한 과정도 깨뜨려야 한다. 이 과정은 그들에게 낯선 것으로 남아있다.”[33]
여기서 바우어는 유대인 해방의 문제를 순수하게 종교적인 문제로 전환하고 있다. 구원을 얻기 위해 유대인이나 기독교인 가운데 누가 더 좋은 기회를 지니는가에 대한 신학적인 의심이 더욱 계몽적인 형식으로 재현되고 있다. 즉, 양자 가운데 누가 더 해방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더이상, 유대교와 기독교 가운데 어떤 것이 자유롭게 하느냐, 고 묻지 않는다. 여기서는 오히려, 유대교를 부정하는 것과 기독교를 부정하는 것 가운데, 어떤 것이 자유롭게 하느냐, 고 묻고 있다.
“만약 그들이 해방되기를 원한다면 유대인들은 그러한 기독교를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들은 분해된 기독교, 분해된 종교, 즉, 계몽과 비판과 그 결과들과, 자유로운 인간성을 받아들여야 한다.”[34]
그러므로 아직도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신앙이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다. 즉, ‘더이상 그러한 기독교를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들은 분해된 기독교,…를 받아들여야 한다.’
바우어는 유대인들에게 기독교 종교의 본질을 깨뜨릴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요구는, 그도 인정했듯이, 유대인적 본성의 발전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바우어가 ‘유대인 문제’ 끝머리에서 유대교에서 다만 기독교에 대한 적나라한 종교적 비판 만을 보았던 순간부터, 바로 이 때문에, 이 문제는 종교적인 의미로만 돌려지게 됐다. 이 때 그는 유대인의 해방을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행위로 전환시켰어야 하는 것으로 기대되고 있었다.
바우어는 유대인의, 즉 그의 종교의, 이상적이고 추상적인 본질을 그것의 전체로서의 본성으로 이해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바르게 결론을 맺을 수 있었다. “유대인은 자신의 제한된 법을 문제 삼지 않기 때문에 인류를 향해 아무런 공헌을 하지 않는다.” 이렇게 그는 그의 모든 유대교를 철저히 부정했다.[35]
따라서 유대인과 기독교인 간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됐다. 기독교인에게 유대인 해방이 부여하고 있는 유일한 관심은 일반적 인간의 그리고 이론적인 관심이다. 유대교는 기독교인의 종교적 관점을 공격하는 환경이다. 기독교인의 관점이 종교적이 되기를 멈추자 마자 환경은 공격적이 되기를 멈춘다. 유대인의 해방은 그 자체가,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수행해야 하는 임무가 아니다.
반대로, 유대인은 만약 그가 스스로 해방되기를 원한다면, 자기 일 이외에 기독교인들의 일, 즉 ‘복음서 비판’이나 ‘예수의 생애’ 등[36]과 같은 일을 수행해야 한다.
“그들을 위해 일을 정리해 보자. 그들은 자기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결코 스스로 조롱거리가 되도록 하지 않을 것이다.”[37]
우리는 물음의 신학적 공식으로부터 탈피해 보고자 한다. 우리에게 해방을 위한 유대인의 능력에 대한 물음은 다음과 같이 다른 질문으로 전환된다. 유대교를 폐지하기 위해 극복되어야 하는 구체적인 사회적 요소는 무엇인가? 왜냐하면 현대 유대인의 해방을 위한 능력은 현대 세계의 해방에 대한 유대교의 관계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계는 필연적으로 현재 노예화된 세계 안에서의 유대교의 특수한 상황으로부터 나타난다.
실제 유대인을 생각해 보자. 바우어가 그랬듯이 안식일을 지키는 유대인을 생각해 보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유대인을 생각해 보자.
종교에서 유대인의 비밀을 찾아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 유대인에게서 종교의 비밀을 찾아보자.
유대교의 세속적 기초는 무엇인가? 실용적인 욕구와 자기 이익이다. 유대인의 세상적 제의는 무엇인가? 돈만 아는 비열한 도붓장수다. 유대인의 세상적 하나님은 무엇인가? 돈이다.
좋다. 그러면 돈만 아는 비열한 도붓 장수와 돈과, 그리고 실제의 실용적 유대인으로부터 유대인을 해방시키면 우리 시대는 해방될 것이다.
돈만 아는 비열한 도붓 장수를 위한 전제 조건과 그 가능성을 폐지할 수 있는 사회적 편성이 유대인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생명을 주는 실제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유대인의 종교적 의식은 맥빠진 수증기처럼 사라지게 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유대인 스스로가 그들의 실용적 본성이 무가치한 것으로 인식하면서 이것을 폐기키 위해 애쓰게 될 때, 그는 지금까지 걸어왔던 발전을 위한 길을 벗어나 보편적 인류 해방을 위해 일하고, 인간 소외의 최고 실용적 현상에 대항해 돌이켜 싸우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대교 안에서, 그동안 유대인에 의해 해로운 국면에서 광적인 열심으로 촉진되어 왔던, 오늘날의 보편적 반사회적 요소와 이의 역사적 발전이 이젠 필연적으로 붕괴를 시작해야하는 지점에서 정점을 이루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종적인 분석의 결론은, 유대인의 해방은 유대교로부터 인류의 해방이다.
유대인들은 이미 유대교적 방식으로 스스로 해방되었다. “비엔나에서만, 예를 들어, 관용되었던 유대인들은 그들의 경제력을 가지고 전 제국의 운명을 결정하고 있다. 가장 작은 독일 국가에서 그 어떤 권리 조차 없음에도 유대인들은 유럽 전체의 운명을 결정하고 있다. 회사들과 길드들은 유대인을 배제했거나, 아니면, 최소한 그들을 적의를 가지고 바라봤지만, 산업의 뻔뻔함은 중세 제도들의 완고함을 비웃고 있다.”[38]
이것은 하나의 특별한 예가 아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유대인적인 방식으로 해방되었다. 이것은 돈의 권력을 획득함을 통해서 뿐 아니라 바로 그 돈이 그들에 의해 그리고 그들과 별도로 세계의 권력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러는 동안 유대인들의 실용적 정신은 기독교 국가들의 실용적 정신이 됐다.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이 되는 한 이미 해방된 것이다.
이처럼, 예를 들자면, 캡틴 해밀톤이 기록하고 있듯이, 뉴 잉글랜드의 독실하고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거주자들은 뱀들이 자신을 물어 죽이고 있는 데도 도망치려고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는, 희랍신화의 라오콘과 같은 종류의 인간들이다. 맘몬이라는 물신이 바로 이들이 입술로 뿐 아니라 그의 몸과 마음을 다해서 섬기는 그들의 우상이다. 그들의 눈에 세상은 증권 거래소 이상의 곳이 아니고, 그가 확신하고 있는 것은 자기 이웃보다 부자가 되는 것 이외의 다른 운명이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장사하는 일이고, 그들이 즐기는 오락이란 물물 교환 이외에 다른 것이 없다. 여행할 때 그들은 항상 자기들이 파는 상품을 지니고 등에는 계산기를 질머지고, 언제 어디서나 항상 이자와 이익에 대해 이야기한다. 만약 그들이 자기 사업에 한눈을 파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경쟁자들의 사업을 엿보기 위해서일 뿐이다.[39]
북 아메리카에서는 참으로 유대교에 의한 기독교 세계의 효율적인 지배가 일상적이고 명백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기독교 설교인복음 설교 자체가 사업의 한 종목이 되었다. 그렇기에 사업에 망한 상인이 교회에서 잘 나가는 목사 사업가로 행세하고 있다. “우대석 맨 앞자리에 앉아서 잘 보이는 저 남자는 처음에 장사를 시작했지만 사업이 망해 목사가 됐다네. 그리고 다른 곳에 앉아 있는 사람은 처음에 사제로 시작했지만 돈을 좀 모으자마자 장사를 위해 사제직을 포기했다지. 많은 사람들의 눈에 종교적 목회라는 것은 이제 산업 전선에서 아주 훌륭한 경력이 되었다네.”[40]
바우어에 의하면, “이론적으로 유대인에게서 정치적 권리를 박탈한다는 것은 좀 위선적인 상황이 될 것이다. 유대인들은 실제로 엄청난 권력을 휘둘러 왔고, 아주 사소한 일에서만 그들을 거부해 왔던 정치적 영향력을 이미 도매업 규모에서 충분히 발휘해 왔기 때문이다.” [41]
유대인의 실질적인 정치력과 유대인의 정치적 권리 사이에 놓인 모순은 정치와 금권 일반의 사이에 놓이 모순이다. 정치는 원리상 금권 보다 우월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에서 정치는 금권의 노예가 되었다.
유대교는 그동안 기독교 곁에 머물러 왔다. 이것은 비단 유대교가 기독교의 종교적인 비판점을 구성하고 있고 기독교의 종교적 기원과 관련한 의심을 체화하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마찬 가지로 실용적 유대인의 정신인 유대교, 혹은 상업[42]이 기독교 사회에서 성행해 왔고 거기서 심지어는 최고의 발전을 이룩해 왔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시민 사회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또한 독특한 방식으로 시민 사회의 유대교를 발휘하고 있다.
유대교는, 역사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역사에 의해, 보존되어 왔다.
시민 사회가 끊임없이 유대인을 위태롭게 한다는 것은 유대인 자신의 창자로부터 나온 이야기다.
유대인의 종교 자체의 근거는 무엇인가? 실용적 욕구와 이기주의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유일신론은 실제로 인간의 무수한 욕구들인 다신론이다. 그것은 변소까지도 하나님의 법으로 만들 수 있는 다신론이다. 실용적 욕구와 이기주의는 시민 사회의 원리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그 실체가 드러나자 마자 시민 사회는 정치적 국가를 완전히 위태롭게 만들어왔다. 실용적 욕망과 자기 이해의 신은 곧 돈이다.
돈은 이스라엘의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다. 그 이외의 신은 존재할 수 없다. 돈은 인류의 모든 신들을 비하시키며 그들을 소모품으로 변하게 했다. 돈은 보편적이고 만물의 자기 충족적인 가치다. 그러므로 이것은 전체 세계에서, 인간 세계와 자연으로부터, 그들 자신의 본래 가치를 박탈했다. 돈은 인간의 노동과 실존의 소외적 본질이다. 이 본질이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은 이를 섬기고 있다.
유대인의 하나님은 세속화되어 이 세상의 하나님이 되었다. 화폐(the bill of exchange)가 유대인의 실제 하나님이다. 그들의 하나님은 다만 환상의 화폐일 뿐이다.
사유 재산과 돈의 지배하에서 자연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자연을 경멸하고 실용적으로 격하시키는 것이다. 자연은 유대인의 종교속에 존재하지만 상상의 피조물로서일 뿐이다.
토마스 뮌쪄가 참을 수 없다고 선언한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다. “모든 피조물이 재산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물속의 고기들, 공중에 나는 새들, 땅위에 자라는 식물들, 이런 피조물들 역시 해방되어야 한다.”[43]
유대인의 종교 요강이 담고 있는 내용인, 이론, 예술, 역사, 그리고 그 자체가 목적인 인간 등에 대한 경멸은 돈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인간의 실질적이고 의식적인 입장과 덕목이다. 심지어는 종관계(species-relation)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남녀 간의 관계도 상업의 대상이 되고 있다. 여자들은 팔려간다.
유대인의 키메라 괴물 같은 국민성은 장사꾼의 것이고, 무엇보다 금융인의 것이다.
유대인의 법은, 어떤 근거나 이유도 없는 것으로서, 도덕성이나 권리 일반에 대한, 어떤 근거나 이유도 없는, 종교적 풍자에 불과한 것이다. 순수하게 형식적인 제의로서, 자기 이해관계의 세계가 이 주위를 맴돌고 있다.
여기서 다시 인간의 최고 상태는 그들의 법적 지위, 즉 그들에게 유효한 법에 대한 그들의 관계가 된다. 이것은 그 법이 그들 자신의 의지나 본성에 대한 법이기 때문이 아니다. 이것은 그 법이 지배적이고 그것을 침해하는 자는 보복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제수이트교는, 바우어가 탈무드에서 발견하고 있는 마찬가지의 실용적 제수이트교로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 법에 대한 자기 이익 세계의 관계이고, 그 법은 세계가 그것의 모든 기술을 동원하여 교묘하게 우회하려고 전력을 다하고 있는 그런 법이다.
참으로 이 세상을 법이라는 틀 안에서 이끌어 나간다는 것은 법의 끊임없는 폐기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유대교가 하나의 이론적인 형식에서 하나의 종교로서 더욱 발전해 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실용적 욕구의 세계관은 본성상 제한적이기에 곧바로 그 성격의 윤곽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실용적 욕구의 종교는 본질상 이론적으로 이의 완성적 성취를 이룰 수 없다. 그것은 다만 실용 속에서만 가능하다. 실용이 바로 이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유대교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없다. 그것은 다만 그 자신의 고유한 활동 영역 안에서만 세계의 새로운 창조와 조건을 가져올 수 있다. 왜냐하면 실용적 욕구는 그것의 정신이 자기 이익이기에 항상 수동적이고, 따라서 자기 의지를 능동적으로 확장할 수 없으며, 오직 사회의 계속적인 발전의 결과로서만 자신을 확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대교는 이의 정점을 시민 사회의 완성에서 얻는다. 그러나 시민 사회가 완성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독교 세계 안에서 뿐이다. 기독교는 모든 것을 대상화 한다. 국가적이고 자연적, 도덕적, 이론적인 모든 관계들을 대상화 한다. 이러한 기독교의 지배하에서만 시민 사회는 완벽하게 국가의 생활로부터 분리될 수 있고, 인간의 모든 종적 유대(species-bonds)를 끊고, 이기주의와 이기적 욕구를 그곳에 만연시키고, 인간적인 세계를 분해해서 원자적이고 적대적인 개인의 세계를 만들어 간다.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생겨났다. 그런데 이제 다시 유대교로 흡수됐다.
처음에 기독교인은 이론적인 유대인들이었다. 결과적으로 유대인은 실용적 기독교인이다. 그리고 실용적 기독교인은 다시 유대인이 되고 있다.
기독교가 실제의 유대교를 극복했던 것은 다만 겉모습 뿐이었다. 그것은 너무나 섬세하고 지나치게 정신적이어서 실용적 욕구의 조야함을 천상적 영역으로 끌어 올리지 않고는 제거할 수 없었다.
기독교는 유대교의 숭고한 사상이다. 유대교는 기독교의 천박한 실용적 응용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용적 응용이 보편화 된 것은 기독교가 완성된 종교로서, 이론적인 형태로, 인간 자신과 자연으로부터의 인간 소외를 완수했을 때였다.
바로 이때 비로소 유대교는 보편적 지배를 얻을 수 있었고 이젠 이기적 욕구와 천박한 장사끼에 사로잡혀, 소외된 인간과 소외된 자연을 소외 가능하고 매매 가능한 대상으로 바꿔버렸다.
대상화는 소외의 실천이다. 인간은 그가 종교에 사로잡혀 있는 한 외계적이고 환상적인 존재에 의해 자신의 본질을 대상화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기적 욕구의 지배하에 놓인 인간은 외계적 존재의 인도에 자신의 생산물과 활동을 맡기면서, 그리고 그것들에 외계적 존재의 뜻, 즉 돈이 따라 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오직 스스로를 확신하며 대상을 생산한다.
기독교의 정신적 이기주의는 그것이 완벽하게 구현되면서 유대인의 물질적 이기주의가 된다. 천상적 욕구는 지상적 욕구로, 주관주의는 자기 이해관계로 변질된다. 유대인의 불굴의 고집은 그들의 종교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 종교가 지니고 있는 인간적 기초인 실용적 욕구와 이기주의에 의해서 비로소 설명된다.
유대인의 본질이 시민 사회 속에서 보편적으로 구현되고 세속화 되었기 때문에 시민 사회는 그들의 종교적 본질이 비현실성을 지닌다고 하는 유대인을 믿지 못한다. 그들의 종교적 본질은 정확하게 실용적 욕구의 이상적 연출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유대인의 본질을 찾을 수 있는 것은 모세 오경이나 탈무드에서 뿐 아니라, 현대 사회 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 추상적 본질로서가 아니라, 지극히 경험적인 본질로서, 유대인의 한계로서 뿐 아니라, 사회의 유대인적인 편협으로서의 본질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사회가 유대교의 경험적 본질, 즉 돈만 아는 비열한 도붓 장수와 그 조건들을 성공적으로 폐지하는 순간 유대인은 더이상 불가능해 진다. 왜냐하면 그의 의식은 대상이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주관적 근거인 실용적 욕구는 인간적인 형식을 취하게 되고, 인간의 개인적이고 감각적인 실존과 그의 종적 실존 간의 갈등은 폐기될 것이다.
유대인의 사회적 해방은 유대교로부터의 사회의 해방이다.
[1] The Jewish question.[Braunschweig, 1843. –Marx]
[2] Bauer, “Die Faehigkeit der heutigen Juden und Christen, frei zu warden,” Einundzwanzig Bogen, p. 57 [Marx]
[3] Chamber of Deputies. Debate of 26th December, 1840. [Marx]
[4] Bauer, Die Judenfrage, p. 64. [Marx]
[5] Ibid., cit [Marx]
[6] Loc.cit. [Marx]
[7] Ibid., p. 71 [Marx]
[8] Bauer, Die Judenfrage, p. 66. [Marx]
[9] Ibid., 97 [Marx]
[10] Bauer, Die Judenfrage, p. 3. [Marx]
[11] Gustave de Beumont, Marie ou l’esclavege aux Etats-Unis, Bruxelles, 1835, 2 vols., II. P. 207. [Marx] Marx refers to another edition, Paris, 1835.
[12] Ibid., p. 216. Beaumont actually refers to all the States of North America.
[13] Ibid., p. 217 [Marx]
[14] G. de Beaumont, op. cit, [Marx]
[15] A. de Tocqueville, de la democratie en Amerique. [Marx]
[16] Thomas Hamilton, Men and Manners in North America, Edinburgh, 1833, 2vol. [Marx] 마르크스는 여기서 독일어 번역판을 인용하고 있다. Manheim. 1834.
[17] Hamilton, op. cit., pp. 288, 306, 309. [Marx]
[18] Hegel, 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1er Aufgabe, 1821, p.346. [Marx]
[19] The terms ‘species-life’(Gattungsleben) and ‘species-being’(Gattungswesen) are derived from Feuerbach. In the first chapter of Das Wesen des Cristemtums[the Essence of Christianity], Leipzig, 1841, Feuerbach discusses the nature of man, and argues that man is to be distinguished from animals not by ‘consciousness’ as such, but by particular kind of consciousness. Man is not only conscious of himself as a member of the human species, and so he apprehends a ‘human essence’ wich is the same in himself and in other men. According to Feuerbach this ability to conceive of ‘speceis’ is the fundamental element in the human power of resoning: “Science is the consciousness of specieis.” Marx while not departing from this meaning of the terms, employs them in other context: and he insists more stongly than Feuerbah that since this “species-consciousness” defines te nature of man, man is oly living and acting authentically(i.e. in accordance with his nature) when he lives and acts deliverately as a ‘speceis-being,’ that is, as a social being.
[20] 앞의 주 참조
[21] 시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22] 정치적 권리를 가진 개인
[23] Bauer, Die Judenfrage, p. 8 [Marx]
[24] Ibid., pp 8-9 [Marx]
[25] Ibid., p. 55 [Marx]
[26] Ibid., p. 56 [Marx]
[27] Ibid., p. 108 [Marx]
[28] Bauer, Die Judenfrage, pp. 19-20 [Marx]
[29] Beaumont, op. cit., II, pp. 206-7 [Marx]
[30] Buchez et Roux, “Robespierre Revolution francaise, Tome XXVIII, jeune.” Historie palementaire de la p. 159 [Marx]
[31] J. J. Rousseau, Du contract social, Book II, Chapter VII, “The Legislater.”마르크스는 이 부분을 불어로 인용했고 자신의 강조점을 더했다. 그는 괄호 부분을 생략했다.
[32] “Die Faehigkeit der heutigen Juden und Christen frei zu warden”
“The capacity of the present-day Jews and Christians to become free”[In Einundzwanzig Bogen aus der Schweiz(Ed. G Herwegh), pp. 56-71, Marx]
[33] Loc., cit., p. 71 [Marx]
[34] Ibid., p. 70 [Marx]
[35] Loc. Cit., p. 65 [Marx]
[36] 마르크스는 여기서 부르노 바우어의 ‘공관복음서의 복음사 비판(1841, Leipzig, Vol I-II)’과 데이비 프리드리히 스트라우스의 ‘예수전(Das leben Jesu, 2 vols, Tuebingen, 1835-6)’을 염두에 두고 말하고 있다.
[37] Bauer, “Die Faehigkeit…,” p. 71 [Marx]
[38] Bauer, Judenfrage, p. 14 [Marx]
[39] Hamilton, op. cit., I, p.213 [Marx]
[40] Beaumont, op. cit., II p.179 [Marx]
[41] Bauer, Die Judenfrage, p.14 [Marx]
[42] 독일어로 ‘유대교(Judentum)’라는 말은 마르크스 당시 언어에서 두번째 의미로 ‘상업(commerce)’의 뜻으로 사용됐다. 마르크스는 이곳과 다른 곳에서 바로 이런 두가지 의미를 염두에 두고 사용한 것이다.
[43] 토마스 뮌쪄가 루터에 대항해서 보낸 팜플렛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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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대수 01.22.10 at 8:42 pm
번역되면 여기 올리실 건가요? 한 번 읽어 보고 싶었는데 외국어 실력이 모자라 번역된 게 아니면 읽기가 힘듭니다. ^^ 올라온다면 저에게는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강인호 01.25.10 at 4:40 pm
허대수님/번역된 원고가 양이 너무 많아 업로드가 안되는 군요. 필요하시면 이멜 주소를 남겨 주시면 화일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inhokangny@gmail.com
강인호 01.25.10 at 7:04 pm
드디어 전문 올리는 데 성공! ㅎㅎㅎ
허대수 01.29.10 at 12:44 am
아, 오늘 찾아와 보고 이메일 주소 남겨드리려고 했는데 전문을 올리는데 성공하셨다니 다행입니다. 이런 글이 웹상에 있으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 그럼, 번역에 아무 보탬도 못 드렸지만 감사히 읽도록 하겠습니다.
강현수 07.11.10 at 5:21 am
여기는 한국입니다. 검색엔진에서 찾았습니다. 귀한 번역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