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보수와 마르크스의 진보

by 황기용 on February 12, 2010 · 2 comments

in e-인문학

이번 주 서양 철학사 시간에는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읽었습니다. 한글 위키피디아에 올려져 있는 번역본을 교재로 사용했죠.

한 세월 흘러 다시 읽으니 다가오는 느낌이 영 색달랐어요. 격화소양이라는 말 있잖아요. 발이 가려워 죽겠는데, 신을 신고 있어서 신 위를 긁어댄다는 뜻이죠. 시원할 리 만무죠.

20대에 이 글을 읽었을 때는, 마르크스가 시대를 낱낱이 예리하게 분석한 방법과 논조가 마치 갑갑하던 신발을 벗어던지고 가렵던 발등을 박박 긁는 것처럼 시원했어요. 근데 삼십여년이 지나 다시 읽으면서 우리 모습을 반추해보니, 뭔가 덫에 걸린 것 같고, 늪에 빠진 것 같은 착잡한 기분입니다.

진보적 대안

마르크스의 시대 진단과 예언과 처방은 우리가 사는 21세기에는 많은 부분이 빗나가고 폐기되었죠. 그러나 마르크스가 해부한 부르주아 사회의 구조와 속성은 19세기와 20세기를 건너오면서 장점은 증발해버리고, 단점만 더욱 부각되고 공고해져서 지금까지 우리를 짓누르고 옥죄고 있습니다.

족쇄가 되어버린 이 낡고 괴로운 틀을 어떻게 해체해야 후유증이 적으려나, 새로 마련할 집과 터전은 어떤 모양이어야 모두가 행복할까, 아니, 쓰나미처럼 덮치는 세상변화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우리 손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길이 있기는 한 걸까, 뭐 그런 생각으로 가슴이 답답하더군요.

중세의 목가적이고 낭만적이던 생산관계, 인간관계에서 진일보한 부르주아 사회의 비인간적이고 돈만 아는 소외구조를 뒤엎으려 했던 마르크스의 유토피아는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했죠. 부르주아 사회의 폐단을 극복하는 길을 결코 중세나 과거의 모델과 결부시키지 않았던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사회건설이라는 전혀 새로운 대안을 내놓았죠. 그 대안의 적합성, 실현가능성, 성패여부를 떠나서 마르크스는 여전히 우리에게 인류의 진보를 얘기할 수 있는 근거를 줍니다.

진정한 보수

반면에, 공자는 진정한 보수가 무엇인가를 가르쳐준 인류의 스승입니다. 공자 역시 격동의 시기였던 춘추말기를 살았던 분이죠. 뒤이은 전국시대는 철기문명이 본격적으로 보급되어 중국사회의 경제구조, 의식구조에 격렬한 지각변동이 일어납니다. 그 징조가 이미 공자시대에도 나타나고 있었죠.

논어에는 공자가 인의와 예가 바로 서지 못하는 세태를 안타까워하는 구절이 곳곳에 나옵니다. 세상은 이미 공자의 이상향이었던 주나라의 예법에 따라 다스리기에는 너무 방만하게 변하고 있었죠. 예전에 확고하던 혈연중심의 신분사회는 이제 새 기반으로 돈과 권력을 갖게된 신흥 지배계층 때문에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제나라 군주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가 뭐냐고 물어요. 공자는 군군(君君), 신신(臣臣), 부부(父父), 자자(子子)라고 대답합니다. 한 사회의 신분질서 속에서 각자의 위치를 점한 모든 사람이 자기의 인간적인 도리를 다한다는 거죠. 이건 단순히 체제옹호나 기득권 유지 차원으로 치부할 수 없는 깊이있는, 인간본성과 관계된 얘기라고 봅니다.

이미 세상은 혈연으로 이뤄진 종적인 신분관계 안에서 지켜오던 인간적인 끈끈한 유대나 속깊은 인정, 염치를 차리는 예의가 제 구실을 못하고 돈과 권력에 얽힌 사사로운 이익과 이해관계만을 좇는 곳으로 변하고 있었죠. 그 해결책을 공자는 옛 질서에서 찾았던 거죠.

그건 단지 좋았던 과거로 돌아가자는 복고운동이 아니라, 자기존재를 가능하게 했던 근원에 대한 추구였고, 그때까지 쌓아져온 문명과 전통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본받고 이어가려는 열망이었죠. 이게 바로 보수의 진면목 아닌가요?

대립과 투쟁인가, 조화와 보완인가

‘공산당 선언’ 서두에 이렇게 써 있죠. 지금까지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공자는 계급간의 갈등을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다른 한 쪽을 소외시키고 억압하는 대립관계로 보지 않았습니다. 쌍방이 나름대로 한계를 가지고 있고, 서로 의존해야만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관계로 보았죠. 

때문에 모순과 갈등을 겪는 양자는 지나침과 모자람의 병폐가 없는 알맞음, 중(中)을 얻도록 애써야 한다고 호소합니다. 대립으로 치달아 조화를 깨뜨리는 건 함께 죽는 길이니까요. 한 세월 전에는 뜨뜨미지근하게 들렸을 이 말이 지금은 어째서 더 와 닿는 걸까요.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계급쌍방의 대립과 투쟁을 더 강조했습니다. 계급간의 모순과 갈등은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지양하고 극복할 때만 해결되고, 다음 단계로 진보, 발전한다고 생각했죠. 정.반.합의 변증법은 논리로서는 아주 아름답고 완결된 것이죠. 하지만, 논리가 아닌 현실에서 순수한 정과 반, 합이라는 단계가 과연 존재하는가 의구심이 듭니다. 왜냐하면, 상반되고 대립하는 모든 것들은 가만 들여다보면, 서로 보완하고 의지하는 요소를 반드시 갖고 있기 때문이죠.  

진보나 보수나, 그게 진정한 거라면, 우리가 사심없이 받아들여야 할 인류의 정신적 자산이고,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삶의 방식을 모색해 나가는 데 필요한 방편인 것이죠.  

 

{ 2 comments… read them below or add one }

강인호 02.12.10 at 9:20 pm

좋은 글입니다. 헌데, 마르크스 사상에서 오늘날 바라 볼 때, ‘빗나가고 폐기된’ 점들과 ‘증발된 장점’에 대한 구체적인 견해가 빠진 듯 합니다. 또한, 공자의 사상에서 ‘군군 신신 부부 자자’의 사상이 어느 점에서 공자의 깊은 인간 이해가 담긴 내용인지도 섬세하게 밝히면 더욱 멋진 글이 되겠지요. 수고 하셨습니다.

황기용 02.13.10 at 2:07 pm

옳은 지적이군요. 쓸 때는 몰랐는데, 다시 보니 필요한 설명을 생략한 채 건너뛴 면이 있네요.
다음 기회에 보완하도록 하겠습니다.

Leave a Comment

You can use these HTML tags and attributes: <a href="" title=""> <abbr title=""> <acronym title=""> <b> <blockquote cite=""> <cite> <code> <del datetime=""> <em> <i> <q cite=""> <strike> <str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