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공부를 마치며..

by 황기용 on February 20, 2010 · 0 comments

in e-인문학

이번 주에는 난공불락의 성처럼 보이던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공부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물론 원본을 직접 읽은 건 아니고요, 강인호 대표가 요약해서 강의한 내용으로 ‘자본론’을 맛봤다는 표현이 맞겠죠.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굉장히 방대하고 난해하기로 소문난 책이어서 접근하기가 쉽지 않죠. 다만 그 속에서 파생된 수많은 사상의 단초들, 처음 규정된 개념들, 새롭게 정의된 어휘들을 접하면서 그 무궁무진한 깊이와 폭을 가늠해 볼 따름입니다.

자본의 자기논리

‘자본론’은 정치경제 비판서로서 마르크스가 사회과학이라는 새로운 학문분야의 선구라는 확고한 의식을 가지고 집필했죠. 정치경제구조의 본질을 변증법적 유물론의 입장에서 분석하고 적나라하게 파헤쳐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밝혀낸 마르크스의 사회과학적 방법론은 어느 시대에 적용해도 그 가치와 유효성이 빛을 잃지 않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이나 하는 행동을 가만 지켜보면, 주변의 다른 존재나 대상과 관계를 맺고 교통하면서 상대를 확인하고 동시에 자기존재를 구현해 갑니다. 그리고 생존과 더 나은 삶을 위해 일을 합니다. 일을 해서 뭔가를 생산해내면 가치가 생겨나죠. 그걸 사용가치라고 합니다. 여기서 모든 존재는 동등하고, 존재가 만들어내는 대상도 동등하다고 마르크스는 전제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만들어낸 대상인 생산물은 돈을 매개로 교환되기 시작하면서 차등이 생기고 상품이 됩니다. 교환가치는 양적으로 환산되기 때문에, 정신적이고 인격적인 영역도 돈으로 가치를 매길 수 있는 대상으로 전락하게 되죠. 상품은 이제 자기논리에 따라 자생구조를 갖게 됩니다. 다른 상품과 관계를 맺으면서 계속 이익을 추구하죠. 상품이 돈을 만들어내고, 돈이 또 상품을 만들어내는 지속적인 생명활동을 이어가게 하는 것이 바로 자본입니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잉여가치를 가지고 일을 하는 노동자에게 돌아가야할 임금을 최소화하고, 이윤을 최대화하려는 것이 자본가의 속성이구요.

가치분배 과정에서 소외된 노동자는 자기가 만들어낸 생산물로부터 소외되고, 결국 자기존재로부터도 소외됩니다. 인간은 대상을 통해 자기존재를 구현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노동을 통해 느껴야할 건강한 기쁨과 보람을 더는 누릴 수 없게 되어버린 거죠. 이런 부조리와 모순구조를 극복하는 해결책을 마르크스는 코뮨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에서 찾았고, 프롤레타리아 사회로 구체화했습니다.

프롤레타리아가 지배하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 부르주아 사회는 극복 대상이었죠. 원래 부르주아라는 말은 중세의 귀족계급이 새로 급부상한 상인계급을 가리켜 도시에 거주하는 계층이라고 얕잡아 부른 데서 생겨났어요. 부르주아 사회가 배출한 인간상도 돈만 아는 이기주의자에 속좁은 위선자, 교양과 문화가 없는 천박한 부류로 규정됐죠. 그러나 기득권을 물려받은 중세 귀족층과 달리 부르주아 계층은 스스로의 힘으로 재산과 법적인 지위를 쟁취하고 교육을 담당하면서 진취적인 에너지와 자기절제, 자율성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마르크스가 살았던 제조업 중심의 산업사회를 지나 기술과 금융자본이 지배하는 사회에 살고 있죠. 마르크스가 예견했던 자본주의의 몰락도, 프롤레타리아 사회건설도 실현되지 않았지만, 물적인 토대나 경제구조는 마르크스가 분석한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채 더 깊은 모순과 소외에 빠진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문명의 어두운 이면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이란 무엇인가, 한번 생각해 봅니다. 시작은 살기 위해서, 그리고 더 잘 살기 위해 땀흘리고 일해서 이루어 놓은 문명이 어느 순간 제도로, 관습으로, 전통으로 대상화되면서 자기논리와 속성과 힘을 갖춘 생명체가 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생명체는 끈질긴 생명력으로 되레 사람을 위협하고 억압하죠.

마르크스의 혁명이론은 끊임없이 변화를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인류 문명사가 지속되는 한, 언제나 유효하리라 봅니다. 같은 맥락에서 동양의 노장사상 역시 문명에 대해 가장 근원적이고 철저한 반성을 촉구하는 혁명이론입니다. 노장사상은 물(物)이라는 것을 인간에게 유익을 주기위해 쓰임을 당하는 것으로 보죠. 때문에 물질을 좇아 자기 몸을 위태롭게 하고 삶을 방기하는 세태를 어리석다 합니다.

노자와 공자사상을 더욱 심화시킨 장자학파는 천지와 내가 더불어 살고, 만물과 내가 하나가 되며, 홀로 천지의 정신과 더불어 왕래하는 경지에 도달하고자 했습니다. 자연과 대립되는 문명, 개인을 억압하는 계급사회처럼 그 어떤 형태의 소외나 이화(異化)에도 비판적이었죠. 또 샘이 마르면 물고기들은 땅 위에 모여 서로 물거품을 내어 적셔 준다, 하지만 이는 강이나 호수에서 서로를 잊고 사는 것만 못하다, 해서 자유롭고 독립적이고 능동적으로 생활하는 인간상을 꿈꿨습니다.

문명의 발전은 천지만물의 생명현상이나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과 어울리고 일치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할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대단한 뭐라 해도 결국 자연을 해치고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 되고 말테니까요. 무엇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인가 하는 문제는 시대마다 숙제로 남겠죠.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천성적으로 정치적 동물이라고 했죠. 공자는 군주는 군주로서, 신하는 신하로서, 아비는 아비로서, 자식은 자식으로서 본분을 다 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인간본성에 따르는 것이라고 봤습니다. 고대 그리스는 시민이라는 개인을 중심으로 구성된 사회였던 반면에, 고대 중국사회는 신분질서도 가족관계를 기반으로 형성된 씨족혈연 공동체였기 때문이죠.  

우리가 만들어 놓은 세상이 우리를 속박하고 비인간화하는 데 깊이 절망하면서도 그 세상에 길들여지고, 그렇게 길들여진 대로 다시 세상을 욕망하는 우리의 존재방식과 삶의 모습은 섬찟합니다. 다섯 번에 걸쳐 마르크스를 공부하면서 인간욕망의 구조와 문명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솔직하게 들여다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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