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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기용 on February 28, 2010 · 1 comment

in e-인문학

인문학당의 존재의의에 대해서 생각해보려 합니다. 지금 인문학당에서 공부하는 분이나 그동안 인문학당을 거쳐간 분들은 모두 한번쯤 인문학당이 무얼 하는 곳이고, 또 무엇을 해야하는 곳인가, 하는 문제를 고민해 봤을 겁니다.

2006년 12월 아틀란타에 인문학당을 처음 시작하면서 내건 기치는 ‘보통사람을 위한 인문학’이었습니다. 보통사람이란 하루하루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는 생활인을 말합니다. 인문학당에 참석하는 사람 모두가 스스로를 보통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으니 이 말에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문학이라는 말은 그렇게 쏙 들어오는 말은 아니죠. 해석의 폭이 넓기 때문에요.

인문학당에서는 인문학에 대한 이해를 고전을 공부하는 걸로 시작했습니다. 동양고전으로는 사서에 해당하는 대학, 중용, 논어, 맹자를 택했고, 서양고전으로는 먼저 서양철학사를 배우는 게 필요하다 판단해서 버트란트 러셀의 서양철학사를 지금까지 읽고 있죠. 그동안 대학과 중용을 뗐고, 지금은 논어를 읽으면서 사자소학도 곁들여 읽고 있죠.

사실 이런 커리큘럼은 요즘같은 시대에 보통사람들에게 쉽지 않은 과정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뭔가 좀 깊이 생각하게 하는 책을 손에서 놓은지 오래고, 세상은 너무 많은 걱정거리, 볼거리, 흥미거리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지금까지 꾸준히 남아 공부하는 분들은 고전이 주는 깊은 맛과 힘을 온 몸으로 느끼고 생활 속에서 경험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문학당에 늘 따라다니는 도전과 회의론이 있습니다. 고전이니, 철학이니 하는 공부가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구름잡는 얘기 아니냐 하는 회의론, 인문학당이 추구하는 청사진이 구체적으로 뭐냐, 말로만 떠들지말고 뭔가를 보여봐라 하는 도전적인 질문입니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많았죠. 대학 커리큘럼에서도 당장 눈앞의 이익과 효용성을 따지면서 인문학 관련학과들이 뒷전으로 밀려나곤 하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재밌는 건, 그렇게 곤두박질쳤던 인문학의 위상이 최근에 서서히 살아나고 있는 거예요. 정보기술시대를 구가하다보니 기술과 접목할 인문학적 상상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거죠. 첨단기술이라는 뼈대는 있는데, 그 속을 채워줄 감성의 영역, 느낌의 세계, 인간적인 깊이 같은 게 절실하다는 거죠.

그런 효용성의 측면에서라도 인문학이 부흥하는 건 좋은 현상이라고 봅니다. 인문학의 영역조차 산뜻하게 상품화하고 상업화해버리는 자본의 괴력에 혀를 내두르게 되고, 그 가벼움이 염려가 되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말이죠.

어쨌든, 인문학당에 와서 세상사는 데 유용한 처세술이나 잘먹고 잘살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구할 수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인문학은 현실에 적응하기 위한 학문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현실이 문제있다는 각성에서 출발하여 더 나은 내일을 위한 방향을 모색하고 변화를 꾀하는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근대의 정신적인 유산을 이어받고 물질적인 구조를 토대삼아 살고있는 우리는 종종 심각한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말하자면, 개인의 재산권 보호와 소유의 권리를 최우선 가치로 삼은 근대정신을 불변의 신조로 삼는다거나 근대의 과학기술에 힘입은 생산극대화, 능력과 자본의 무한경쟁같은 걸 금과옥조로 여기면서 마치 다른 세상은  가능하지 않다는 듯 행동한다는 거죠.

의료보험개혁안 하나를 가지고도 수세에 몰려,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라고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아야 하는 오바마 대통령의 처지를 보면, 미국사회의 척박한 정신유산과 열악한 대중정서를 읽게 됩니다. 생산과 그에 따른 부가 있으면, 마땅히 분배를 얘기해야 합니다. 혹시 사회적인 약자는 모두 게으르고 무능력하고 무시해도 되는 존재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런 색안경을 끼기 전에, 그런 계층을 생겨나게 한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과 불균형의 문제를 먼저 따져야 옳은 것 아닌가요?

개인의 행복과 부유함에는 그토록 집착하면서 모두가 행복하고 모두가 잘 사는 길은 안중에도 없는 단세포적인 사고방식, 승자만 대우받고 각광받으면서 모든 걸 독차지하는 승자독식 현상, 어느 개그맨의 일갈처럼 일등만 기억하는 드러운 사회풍조 같은 건 정말 바람직하지 않죠.

근대 이후에 수많은 진보의 논리가 있어 왔습니다. 그리고 근대의 시민으로 살아온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땀과 노력을 인류의 발전을 위해 바쳐 왔죠. 그 열매는 더 잘나고, 더 많이 가지고, 더 힘이 있는 사람들만의 소유가 아닌, 지구촌 모두가 누려야할 결과물입니다. 해서 지금 절실한 진보는 인간 본연의 요구와 기본권에 부응하는 분배를 추구하는 운동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인문학을 공부하는 지성인의 자세는 이런 게 아닐까 늘 마음에 새기곤 합니다. 한 가지는 마르크스가 말한 대로, 철학자의 임무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있다는 깨달음입니다. 또 하나는 박경리 선생이 문학의 역할을 얘기하면서 한 말인데요. 소설가는 추수가 끝난 텅 빈 들판에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벼이삭을 주워들이는 사람이라 했죠. 마르크스의 선언이 지성인의 선구적인 책무를 지적한 것이라면, 박경리 선생의 얘기는 시대의 맨 뒤에서 대세에 뒤처지고 낙오된 사람들을 다 보듬고 가는 지성인의 따뜻한 마음가짐을 강조한 것이죠.    

 

  •  인문학당에서 꼭 읽었으면 하는 책이 있어 제안합니다. 제레미 리프킨의 ‘유러피안 드림’이라는 책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읽었다고 해서 더 유명해졌죠. 저도 읽어보지 못했지만, 물질적인 풍요와 이기적인 경쟁에 기초한 아메리칸 드림을 넘어서는 현실적 대안으로 유럽에서 번지고 있는 소규모 공동체 운동과 함께 잘 사는 삶의 방식을 조명한 책이라고 들었습니다. 철학이론 위주로 공부하다 보니, 가끔 사회현안에 집중하여 현실인식이랄까, 구체적인 대안을 그려보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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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호 03.01.10 at 8:01 am

지난 목요일 토론 시간에 거론 됐던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특히 그동안에 형성된 인문학당의 흐름에 대해 전혀 감을 잡지 못한 상태에서 토론에 참여했던 이들의 무개념적인 발언들을 들으면서, 아무래도 우리에게 여전히 인문학에 대한 확고한 이해가 부족하구나 싶었습니다. 이곳 평화원의 녹상재님도 바로 그러한 들으셨는지 컴퓨터에 앉아 나름대로의 느낌과 의견을 글로 정리하고 계신 것을 봤습니다.

나름대로 스스로 지성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인생의 최대 목표가 여전히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교육이라는 것도 결국 돈이 있어야 되는 것 아니냐며 기탄없이(!) 말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적지 않은 분들이 ‘저건 아닌데..’라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이번 글은 바로 이런 마음을 잘 표현하셨군요. 수고하셨소이다.

이곳 평화원의 녹상재님도 뭔가 하실 말씀을 글로 정리하고 계시고, 저도 나름대로 인문학당의 미션 스테이트먼트를 새로 정리해 볼까 생각 중입니다. 아마 좋은 계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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