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질문 몇가지

by 황기용 on March 8, 2010 · 2 comments

in e-인문학

이번 주에 베르그송을 공부하면서, 동양사상과 정서적으로 통하는 면이 있다고 느꼈어요. 베르그송에 대해 배운 내용을 기초로 그 부분을 한번 연결시켜 보려고 합니다. 뚜렷한 어떤 이론적 근거를 가지고 접근하는 건 아니고, 느낌과 심상(心像)에 기대어 얘기를 전개해 보려 합니다.

베르그송의 지속과 노자의 상(常)

먼저, 베르그송의 지속(Duration)개념입니다. 베르그송은 세상을 생명덩어리로 보았죠. 우리가 이 생명덩어리를 이성이나 지성으로 인식한다고 하면서 물질화하고 고체화하고 공간화한다고 했어요. 생명은 본능과 직관을 통해서 인식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베르그송은 지속이라는 개념으로 생명을 설명하죠.

생명은 시간이고 지속인데, 내가 나를 대상화하고 사물을 객관화할 때 지속은 깨지고 나와 세상은 더 이상 펄떡이며 살아 움직이는 생명이 아니라고 봤어요. 객관세계는 일루젼이고 허상이기 때문에, 외적인 것의 침투를 받지 않을수록 순수한 지속이고, 실재하는 시간은 무엇보다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곳에 있다고 생각했죠.

저는 베르그송의 지속에서 노자의 상(常)을 봤어요. 노자 도덕경 1장은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으로 시작합니다. 도를 도라고 말하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지으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좀 더 풀자면, 도를 도라고 규정하고 객관화하는 순간 도는 진정한 도가 아니게 되고, 사물에 이름을 붙여 대상화하는 순간 이름은 본래의 의미를 잃게 된다고 새길 수 있겠죠.

도덕경 1장은 동양철학이 천지만물을 인식하는 틀을 보여주는 인식론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노자의 상(常)은 항상 그러함이고 변화의 지속을 가리키는 상이죠. 변화 그 자체를 리얼리티로 보고, 끊임없이 면면히 이어지는 변화 속에서 지속을 보는 거죠.

노자 1장 중간부분에 상무욕이관기묘 상유욕이관기요(常無欲而觀其妙 常有欲而觀其邀)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구절은 크게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는, 늘 욕심을 품지 않으면 그 묘함을 본다,고 해서 상(常)을 늘이라는 부사로, 욕(欲)을 일반적인 욕망 같은 걸로 해석합니다. 또 다른 해석은, 항상 어떤 이름을 붙이려고 하지 않으면 그 묘함을 본다,고 풉니다. 여기서도 상은 부사로 보죠.

그런데, 상을 부사로 보지않고 명사로 볼 수는 없을까요? 상(常)을 밝히고 규정하려고 하지 않으면 그 묘함을 보고, 상을 밝혀내 인식하려고 하면 그 가장자리를 본다고 말이죠. 상(常)은 한없이 번다하고 깊고 오묘하며 수없이 겹쳐져 흐르는 변화의 늘 그러한 상태, 베르그송의 말대로 하면 지속이죠.

현(玄)에 노니는 경지

하지만, 동양에서 말하는 변화는 임의롭거나 주관적이거나 심리적인 차원의 지속이 아니라, 극도로 미묘한 심미의 경지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베르그송이 지속에서 순수를 고집하며 객관세계를 허상으로 돌려버리고 철저한 주관주의에 안주하여 이원론의 함정에 빠지는 것과는 달리, 동양의 변화는 무수히 잡다한 국면들이 뒤섞여있는 상잡(相雜)한 상태 그대로를 상(常)으로 봅니다.

그 진면목을 온전히 파악하거나 명약관화하게 밝혀낼 수는 없지만, 어느 맑은 순간 상(常)의 묘함이 드러나고 그 전모를 알 수 있는 심미적인 팽팽한 긴장, 시계추의 섬세한 균형을 끝까지 유지하는 게 중요합니다. 노자는 그 오묘함을 현(玄)이라 표현했어요. 검을 현입니다. 거뭇거뭇 가믈가믈 드러날 듯 말듯 무엇인지 분명치 않고 불가사의하고 신묘한 상태를 가리키죠.

또 한가지는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Creative Evolution)개념입니다. 베르그송은 생명에는 목적이 있을 수 없다고 봤죠. 그래서 창조에도 목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외부에서 요청되는 목적론적인 것이 아니라, 본능 속에 있는 충동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창조적이라고 봤죠.

서양철학이 플라톤에서부터 헤겔에 이르기까지, 아니 마르크스까지도 생성과 변화를 얘기하면서도 하나의 방향, 최종의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 목적론적 사상체계를 가진다고 볼때,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는 서양철학의 그런 전통에서 벗어난 탈근대의 면모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이원론의 족쇄와 목적론적 사슬이라는 서양철학의 두 가지 딜레마에서 동양사상은 자유롭습니다. 허나 동양사상의 광대하고 심오한 경지는 논리로 도달하는 게 아니라, 심미의 경계에서 노니는 것이기 때문에 일면 허약하고 애매한 구석이 있죠. 하지만 그 경계에 가까이 가본 사람이라면, 그 경지를 조금이라도 맛본 사람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않을까요. 다만 경계선에서 오락가락하지 않고 깊은 경지 속으로 푹 빠져볼 날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 2 comments… read them below or add one }

강인호 03.09.10 at 9:30 am

베륵손의 생명과 노자의 常을 연결해서 이해한 것은 절묘한 해석입니다.

그런데, 상무욕이관기묘에서 ‘이’는 ‘而’ 가 아니라 ‘以’가 아닙니까? 상유욕이관기요도 마찬가지구요.
중국인들은 이걸 이렇게 잃습디다. 常無, 欲以觀其妙 常有, 慾以觀其邀, 즉, 언제나 무는 묘함을 보고자 하고, 언제나 유는 가장자리를 보고자 한다(중국어판 위키백과). 하지만 상을 명사로 보는 게 더 재미 있는 것 같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아이오아에서 임종소식이 와서 더 잇지 못합니다.

황기용 03.23.10 at 12:21 pm

말이을 이(而)가 아니라, 써 이(以)가 맞습니다. 제 실수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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